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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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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은

제목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일시: 2022년 4월 10일
본문: 요한복음 15: 12-14
찬송: 새151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새453 예수 더 알기 원하네, 154생명의 주여 면류관
교독문: 새131



1.
얼마 전 텔레비전 음악 방송 중에 “너의 목소리가 보여” 줄여서 <너•목•보>를 시청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개인이나 팀으로 6의 참가자가 나와서 이 참가자가 음치인지 진짜 노래를 잘하는 가려내는 방송입니다. 가려내는 사람은 2명으로 된 임의로 만든 팀이거나 기존에 팀으로 활동하는 현역 가수들입니다. 여기에다가 사회자팀이 진행하고, 가려내는 가수들을 응원하며 겸 자기 의견을 각자 말해서 방해 하는 음치수사대도 있습니다. 그날 출연한 가려내는 팀은 한명은 영화배우 겸 가수였고, 다른 사람 역시 실력으로 인정받는 가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확실하게 음치를 가려내고 노래잘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노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6의 참가자가 노래를 잘하는 것과 노래를 못하는 두 가지 립싱크버전을 보고나서 음치로 의심되는 팀을 가려내면 그 팀이 무대에 올라 실제 자기 실력을 보여주게 됩니다. 하필 처음부터 노래 잘하는 사람이 음치로 지목되었습니다. 중간쯤 되어서야 겨우 음치 한 팀을 골라내었습니다. 음치를 골라내는 적중률이 높다는 사람치곤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습니다. 고르는 사람들은 마지막 두 팀이 남았을 때까지도 어느 팀이 음치일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두 팀 중 한사람의 목소리가 깊어서 동굴 같은 매력있는 목소리였습니다. ‘제발 저 목소리가 진짜 저 사람의 목소리였으면!’ 싶었습니다. 마침 가수들도 그 사람이 노래 잘하는 사람일거라고 마지막무대를 같이 하겠다고 해서 마지막사람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완벽한 음치였습니다! 허탈했지만 그게 저 사람이 나를 속인 게 아니고 내가 기대한 것이고,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더 이상 감정을 가지는 건 욕심이며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한낱 티비방송을 보고도 욕심이 발동됩니다.


2.
사람이 가진 욕심 얘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로마에게 유대사회는 골칫거리였습니다. 크고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함락했지만 이스라엘이 로마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계속 있었습니다. 로마는 유대의 예민한 부분인 종교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총독을 파견하고 경제적 수탈을 했습니다. 로마와 유대사회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는데 로마가 이 갈등을 잠재우며 조금 더 이스라엘을 장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산헤드린 의회재판을 거쳐 “이스라엘의 왕”이라 추앙받는 예수에게 정치범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형인 사형선고를 내려달라고 했습니다(마27:23). 유대총독 빌라도는 예수가 벌 받을 행동을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마27:18). 그런데도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민란이 일어나려 것을 보고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는 손 씻는 행동을 하며 자기의 결정권을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하며 행사했습니다(마27:24).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에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구절을 뺄 수는 없습니다. 이 의롭지 못한 재판정에 인간의 욕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고발당한 증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증거 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라고 예수께 물어서 한 대답입니다. 예수는 “당신이 말하였소,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요” 하며 구약의 말씀으로 자신의 인자됨을 인정하였는데 이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한 것입니다. 고발할 거리를 찾아 겨우 얘기된 것뿐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을 박해하는 로마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은 예수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자를 칭하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눈으로 본다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하나님만 할 수 있는 네 죄가 사함받았다고 했으니 이 또한 신성모독이었을 것입니다(마9:2-3). 지금도 이스라엘은 안식일이 되면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자동으로 서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에 등이 켜져 있습니다. 안식일에 스위치를 누르는 노동을 할 수 없으므로 미리 설정을 해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예수께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냐는 질문을 했고, 예수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마12:10-12)고 안식일법을 범하는 말을 하셨으니 유대인들 안에는 고발거리들이 쌓여져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한편에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두려움에 사로잡히어 이런 능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무리가 있었(마9:8 표준새번역)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발하는 용도로 예수의 활동을 보는 이들(마9:3, 마12:10)도 있었습니다. 무리가 예수를 자신들의 정치적 독립까지 이끌어 줄 그리스도가 될 사람으로 기대했다가 선동되어 광기어린 분노를 표출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열심히 예수를 따르는 일련의 사람들과 다른 편에 적대자가 있는 상황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죽은 자를 일으키는 한 사건에서 수난이 발전됩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예수의 죽음을 초래하는 직접적 원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니 대제사장과 공회가 가능한 신속하게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게 됩니다(요11:45-53). 예수로 인해 또다시 민족봉기가 일어나면 로마의 실험적인 정치형태가 바뀌어서 이스라엘을 좀더 직접적인 형태로 다스릴 것이니 예수를 잡는 것이 유익하다는 판단을 내세우면서 말입니다(요11:50) 이렇게 이루어진 일에 자기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나사로의 얘기가 예수의 수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더 보겠습니다. 예수가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시며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11:36)” 이들의 말은 말한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운 이유를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나사로를 살려낼 것을 이미 알고, 친구를 살려낸 그 행위로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특별히 감정을 느끼시는데(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11:33,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11:38) 그 감정은 앞으로 베다니의 자매들이 느낄 슬픔과 맞물리면서 예수가 그들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일이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과 어우러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죽을 운명을 직감하고 멈칫하는 순간은 과히 겟세마네 장면과 필적할 만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요12:27)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고난받는 사람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친구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하고 고하는 것입니다.

4.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나사로를 살리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여 말하자면 유언처럼 남기는 당부를 제자들에게 합니다. 유언이라는 말이 그다지 적합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예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믿는 자들에게 길과 진리가 되는 마당에 유언이라고 따로 분류하여 강조하는 것이 별 마뜩치는 않지만 시기상 이 단어를 사용해 봅니다. 예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고 하면서 예수가 주신 최고의 사랑의 표현과 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신 것같이 예수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합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하며 사랑의 계속성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인데, 이는 마치 예수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사랑과 계명은 연결되어 사랑은 계명을 지킴에서 나오며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수의 ‘사랑하여라’ 는 구약의 모세도 말한 새로운 계명은 아닙니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 사랑을 실천하여 보여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는 아주 다정하게 자신의 마지막에 그의 주변에 있는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강권하는 것이 아니라 종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친밀하게 친구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에게 공감하며, 자신의 행복을 쫒지 아니하고 너희의 행복과 생명을 위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먼저 채우는 이웃중심적 사랑입니다. 이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웃사랑으로 열매맺는 삶입니다. 그

자신의 목숨을 친구를 위하여 바치면서 십자가에서 예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합니다(요19:26-27).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어머니요, 또 한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예수는 고통가운데에서 어머니와 친구에게 사랑의 관심을 표합니다. 예수가 없이 살아가야할 사람들의 삶을 준비시킵니다. 예수는 자기를 대신하여 아들이 될 것과 어머니가 될 것을, 친구가 될 것을 당부합니다. 예수의 고통과 십자가를 지는 운명까지도 그의 사랑을 무력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5.
예수가 공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며 사랑하라는 말을 더 깊이 새기게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가 당부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막을 수 없는 생명의 물입니다. 광명한 빛이어서 온 세상을 보게 합니다. 그러나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주후80-90년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다른 한편으로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 때문에, 그리고 로마인들은 황제를 가리키는 ‘주’를 예수께만 적용하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으로부터 출교당했는데 이는 유대사회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회당의 기도문이 도입되는 시기였습니다. 요한복음을 쓰는 제자는 기억을 회상하여 세상이 나를 미워하였다는 예수의 말씀을 기록해둡니다(요15:25).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미움을 받을 때 말씀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이러한 박해의 시대는 아니지만 예수께서 당부하신 사랑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단번에 이루신 일이나 우리에게는 매번 확증해야하는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세상속에서 비틀어지고 꼬아질대로 꼬인 우리들에게 예수의 사랑은 오히려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예수처럼… ’말씀을 굳게 잡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씀을 굳게 잡습니다. 말씀안에서 우리의 전부를 아시는 하나님의 그 시선처럼 우리 자신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고난앞에서 웃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동의하시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부르짖고, 큰소리로 외치시고 우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울면서 소리치는 것은 견디는 것이고 사는 것이고 사랑입니다. 죽으나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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