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예람교회입니다. 환영합니다.
 
 

 
설교말씀

958   1/48

 내용보기

작성자


박영신

제목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본문 시편 73: 24-26; 로마서 6: 5-13/찬송 20, 359, 465 /교독 6 (시편 15편)


1. ‘부활 사건’ 되새김:

올해 부활주일에도 멀리 다른 나라에 사는 예람들과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부활 사건’의 뜻을 다시 새겼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식탁’의 뜻을 기억하며 새기고, ‘다른 삶을 살게 된’ 은총을 다지며 새기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이 권세를 우리도 이기게 하심을 감사하며 새겼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새기며 참여한 성찬식과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이 믿음은 참 특별하고 귀합니다. 종교들마다 자기 종교를 세운 교조의 태어난 날을 맞아 다채롭고 성대한 행사를 벌이기는 하지만 그의 고난과 죽음을 중히 여겨 이를 기억하며 새기지 않습니다. 더욱이나 그의 부활을 기념하며 새기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는 기억하고 새깁니다. 부활절은 이 특이한 믿음을 표상합니다.

우리가 한해 한번 부활주일을 맞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지만, 헤아려보면 주일마다 그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온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는 주일을 예배의 날로 정했습니다. 주님이 안식일 다음 날인 한 주의 첫째 날, 곧 일요일에 다시 사셨다는 그의 부활 사건(마태복음 28: 1)을 기억하고자 해서입니다. 이 날을 ‘주(님)의 날’(the Lord’s Day)/‘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요한계시록 1: 10). 그만큼 우리의 믿음은 그의 ‘다시 사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참으로 독특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전통에 따라, 교회는 주님의 ‘다시 사심’을 한 해에 한 번 맞는 부활절 날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빠지지 않고 주일마다 만나(히브리 10: 25) 공동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부활을 함께 기억코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억의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에 터하여, 그리고 한 주 전 ‘공동 설교’의 줄기 곧,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실행’하며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매일 주님의 부활을 되새기는’ 부활 믿음에 이어, 믿음을 가진 사람다운 삶의 뜻을  함께 다시 살펴보면 합니다.


2. 그리스도와 ‘하나 됨’:

부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부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몸소 보여주시면서 기억하라고 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삽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푸는 수준을 넘어 그들을 식탁에 초대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끼리끼리의 초대 수준을 넘어 주님을 가운데 모시고 모두가 함께 식탁에 둘러앉습니다. 주님 안에서 어떤 칸막이도 없이 모두가 벗이 되고 형제자매가 됩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보는 세상 사람과 달리, 부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 땅 위에서 ‘먹고 마시며 사는 삶’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의인과 악인 모두 심판을 받는 날도 내다보고, ‘여기 이제’ 그 너머 주님과 함께 하는 삶도 그립니다. 이러한 믿음을 품고 사는 삶이란 간단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름 받은 제자들이 모든 난관을 뚫고 부활 신앙을 널리 전하며 살았듯이 믿음의 사람도 이 사건을 새기며 세상에서 겪어야 할 모든 어려움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는 모두 세상 사람과는 ‘다른’ 믿는 사람의 구별된 삶을 증언코자 했습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는 기독교의 믿음을 가장 체계 있게 풀이하고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읽기가 어렵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믿음의 핵심을 깊이 있게 따져 일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로마서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무엇이며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밝게 드러내줍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라고 합니다. 그와 ‘하나’ 되라고 합니다. 그와 ‘일체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풀이하는 대로, 세상 따라 세상 식으로 살던 이전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여 그와 ‘하나’가 되면서 끝납니다. 그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 바에는, 세상에 맞춰 세상을 받들며 살던 이전의 ‘나’는 끝나야 하겠지요. 죽어야겠지요. 더 이상 세상의 종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지요. 이러한 뜻에서 이전의 세상 종살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5-6).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기를 치켜세우며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업신여기는 짓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입니다. ‘옛 사람’은 바로 이 죄에 종노릇하며 산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7). 구원 받았습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와 함께 다시 살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죄가 다스리는 세상에 맞춰 살던 지난날의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그를 따르는 ‘새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를 믿고 받아들입니다(8-11). 이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고 이에 대한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틀을 고집합니다. 그 틀에 맞춰 삽니다. 그것이 삶의 현실이고 그것이 삶의 척도라고 믿습니다. 다른 삶의 가능성에는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셈할 수 있는 돈뭉치를 거머쥐고 휘두를 수 있는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약삭빠르고 사납게 굽니다. 모두가 돈 벌기에 핏발이 서 있고 힘 기르기에 안달을 부립니다. ‘옛 사람’과는 다른 ‘새 사람’을 생각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을 떨쳐내지 못하는 한, 본문의 표현으로 ‘옛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새 사람’을 그리지 못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가 되면서 비로소 이전에 세상 식으로 살던 ‘사람’ 곧 ‘내’가 ‘옛 사람’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고,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 곧 ‘내’가 ‘새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의로움을 받은 ‘새 사람’ ‘나’는 더 이상 ‘불의의 연장’이 되어 죄에 종살이하지 않고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삶을 삽니다. 시편에서 읽듯이, 주의 말씀이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편을 쓴 시인처럼 ‘주 이외에 우리가 받들 분이 어디 있으며 주 이외에 우리가 사모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부활 신앙의 삶입니다.    


3. 그리스도인:

요즘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 가운데 들어서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나왔고 그 전 주일에도 나왔던 ‘장애인’ 문제가 보기입니다.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이 정하는 ‘우선순위’에 따라 그들의 이익과 편리를 늘이고 지키는 일을 급선무라고 하여 모든 자원을 이에 초점을 맞춰 집행합니다. 정치꾼들은 이른바 ‘다수’라는 유권자의 표를 계산하여 이들 ‘다수’ 쪽에 섭니다. 표를 가진 다수의 욕심을 반영하고 이기심을 대변하는 꼴입니다. 다수의 욕심과 이기심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복지 정책도 세율도 다수의 선호에 맞춥니다. 장애인은 소수입니다. 가진 표가 많지 않습니다. 오랜 세울 동안 불편을 호소하며 외치고 또 외쳐도, 그들의 말로 “목 놓아 외쳤[지만]” 다수는 듣지 않았습니다.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장애인들은 “변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의 요구는 기득권자들이 정하는 우선순위 항목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어떤 대화도 없이 다수의 호불호와 유불리 판단에 따라 눈에 잘 뜨이지 않게 장애인들을 외딴 어느 시설에 가두어둘 생각만 했습니다. 자유로운 이동을 차단한 부자유한 감금이 다수가 생각해낸 ‘장애인 복지’였습니다.    

걸핏하면 십자가를 들고 광화문이나 시청 광장을 점거하곤 하는 대형 기독교 집단들도 ‘다수’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짜인 강고한 우선순위의 체제를 질문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의 우선순위가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우선순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고’ 교인이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하는데, ‘주여, 주여!’ 하고 질러대는 소리 이외에는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가 된 믿음의 사람이라면,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무력하고 무의미해져야 하는데, ‘옛 사람’의 기세는 등등합니다. 진정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가 된 믿음의 사람이라면,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새 사람’답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죽은 사람들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옛 사람’으로 살고 있다면 이는 겉발림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이는 가짜 믿음입니다. 거부되어야 할 믿음입니다. 바울의 표현으로, ‘옛 사람’은 ‘죄의 노예’입니다.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죄의 세력에 묶여 사는 죄의 종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 주님과 ‘하나’되어 움직입니다.


4. 그리스도인답게: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 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다음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 ‘믿음’으로, 우리는 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와 ‘하나’ 되어 그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노력에서, 우리가 배워서, 우리가 선량해서, 우리가 거룩해서 하나님의 딸과 아들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가 부르셨기에 우리 모두가 이렇게 ‘예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됨됨이가 아무리 빼어난다고 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일 따름입니다. 겸허를 잃고는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오만’은 참으로 위험한 망상이고 착각입니다. 로마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힘주어 일러줍니다. 하지만 자칫 이를 그릇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한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참 믿음의 뜻을 밝혀줍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뒷짐 지고 세태를 구경하며 세태에 자신을 맡겨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라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우리 몸에 “죄가 왕 노릇 하여 몸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하고(12), 우리가 ‘불의의 연장’으로 죄에 부림 받지 말고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13).

우리는 ‘옛 사람’의 죽음 이후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새 삶의 지평에 들게 되었습니다. ‘불의의 연장’으로 살지 않고 ‘의의 연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게 된 고결한 삶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이 은혜를 기리며 주께 찬양합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기도>


죽음 이후의 부활을 알지 못하는
꽉 막힌 세상 사람과 달리,
우리는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는
확 트인 예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 사람’처럼
‘불의의 연장’으로 살지 않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새 사람’답게
‘의의 연장’으로 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rev
 어떤 복음인가? -갈라디아서 3
한문순 2022/04/24 164
Next
 [부활절 공동설교] 매일 되새기는 예수 부활
한문순 2022/04/24 164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Muzclu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