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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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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신

제목


개신교 믿음, 다시 새김
본문 이사야 8: 19-20, 요한복음 1: 14/찬송 20, 355, 384/교독 6 (시편 15편)

1. 이어서:

우리가 듣는 대로, 개신교의 전통을 귀히 여기는 나라에서는 ‘10월’을 일컬어 ‘종교개혁의 달’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 10월을 맞아 이를 기리고 새기려는 여러 행사를 베풉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한 달 내내 종교개혁의 신앙 전통을 꾸준히 연구해온 이들을 초빙해서 강연 모임도 열고 이 개혁 전통에 초점을 맞춰 설교도 하고, 이를 되짚어보려는 특별 순서도 기획합니다. 종교개혁 500돌이 되던 지난 2017년에는 기독교방송의 ‘대담’ 프로그램(CBS)(https://www.youtube.com/watch?v=MNSQnHUdOKE)에 나도 함께해서 이 개혁 운동의 의미와 교회의 현실을 두고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이해에도 나라 안팎 곳곳에서 이 개혁 전통을 여러 모습으로 기리며 새기고 있을 터입니다.

오늘 이 시간, 본문에 기대어 우리가 이어받은 이 개혁 신앙의 전통을 다시 함께 새겨보면 합니다.    


2. ‘말씀’의 길잡이:

쉼 없이 함께 새기며 다지고 있듯이, 종교개혁 운동의 밑바탕에는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이 ‘성경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아무나 부르고 아무렇게나 그리는 ‘마구잡이식’ 하나님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러주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믿음의 항목이 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의 뜻도, 죄와 구원의 가르침도, 십자가와 부활의 힘도, 교회의 됨됨이와 공동체의 본보기도 모두 이 ‘말씀’에 터합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교회가 된다’고 선언한 예람교회의 고백과 결의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뿌리내린 개혁교회의 고백이고 결의입니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가 ‘성경 말씀’에서 빗나가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말씀’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져든 타락한 교회를 ‘말씀’으로 되돌려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로마 교회가 대성당을 짓는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계책으로 금전이나 재물을 바치면 죄를 면해주겠다며 팔았던 ‘면죄부’에 대한 비판이 좋은 보기입니다. 면죄부 판매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성경’에 어긋나는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조작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마르틴 루터가 공개리에 교리 문제를 던지며 교회 당국에 도전했습니다(임 선생과 안 선생이 <자유게시판>에 올린 ‘95개조’ 자료 볼 것). 코로나 큰 돌림병이 나돌기 이전 우리가 함께 공부한 이사야서에서 읽듯이,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죽은 사람을 불러내 점을 치는 무당과 점쟁이들”을 찾게 하는 미신이고 속임수였습니다.

루터가 불을 지핀 개혁 운동에 동참한 이들은 ‘성경 말씀’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당대 교회의 신앙 노선과 행태, 교회 조직과 운영 방식을 규탄했습니다. 교황과 그의 명령보다 ‘성경 말씀’의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모두’가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고전어로 된 성경을 토박이 말글로 옮겼습니다. 마침 인쇄 기술이 발달하여 이 성경은 날개를 달고 널리 퍼져 널리 읽혔습니다. 자국어 독해 인구가 늘어나고 인민 일반의 자의식이 뿜어나왔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에 힘입어 서구의 역사 진로가, 온 세계의 역사 진로가 바뀌었습니다.

교회 개혁의 역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복잡합니다. 우선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고 거기에 믿음이 터하고 있어야 한다고 굳게 다지게는 되었지만, 신구약 성경은 그 자체가 어마어마한 문헌이기 때문에 그 말씀의 뜻을 온전히 알고 풀이하기에는 인간의 능력 자체가 부족하고 제한되기 마련입니다. 일반 학문 세계에서도 성경 주석의 학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사의 눈으로 보면 물론 이 둘은 각각 떨어져 있지 않고 뒤섞여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주고받으며 쌓이게 된 이 연구 업적은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산더미가 되었습니다. 깊이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자기의 왜소함을 절감치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과 ‘비신앙’을 풀이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판가름하고,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을 일러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열어 보여주시는 이 ‘성경 말씀’ 앞에서, 아무리 신실하다고 하더라도 자칫 어느 함정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복잡한 내용을 단순화하는가 하면, 전체를 부분으로 축소하는 오해와 오류의 실책과 과실은 학문과 신앙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 이해와 풀이에 길잡이가 있어야 했습니다. ‘신앙 고백’이 이 몫을 맡았습니다.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개혁가들이 내놓은 여러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서로 통하고 이어지지만, 우리 교회가 터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좋은 길잡이입니다. 지난해 사경회 때 함께 공부하면서 확인했듯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선출’된 개혁 신앙 운동의 대표들이 5년 넘게, 1천 200회 가까운 정규 회의(토요일과 주일을 빼고 매일 이른 9시부터 늦은 1시와 2시까지 모였고, 오후에는 위원회별로 모였습니다)를 열어 ‘성경’,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구원’, ‘교회’, ‘성찬’, ‘주일 성수’의 문제를 파헤쳐 체계 있게 정리하여 이 <신앙고백>을 내놓았습니다. 지난날 오늘날 할 것 없이 모두가 빠져들 수 있는 ‘곁길’에 대한 경고를 담았다고 할 수 있고, 믿는 사람의 맘가짐과 몸가짐, 생각과 삶에 대한 지침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교회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교회에서도 세례를 받을 때 이 <신앙고백>에 터한 ‘문답서’를 읽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먼저 글로 적어 ‘확증’ 받은 다음에, 하나님과 공중 앞에서 ‘서약’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신앙 고백>이 유일하지 않습니다. 다른 <고백>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모이고 갈라졌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수많은 개신교 교파/교회가 나타나게 된 배경입니다.


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경 말씀’은 현실성 없는 공허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식자들이 말하는 사변의 세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성경’을 두고 교회마다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말만 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은 실제성과 행동성을 요구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거기서 삶의 방향과 활력을 받았던 마르틴 루터와 개혁가들이 이의 증거입니다.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고 그것이 일러주는 대로 행동하며 산다면 자기의 삶이 바뀌고 자기가 사는 삶의 터전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 개혁 신앙을 가진 ‘믿는 사람’이라면 ‘적극 참여자’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성경 말씀’을 증언하며 실행하는 주님의 일꾼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삶의 원형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그에 잇대어 풀이합니다. 요한복음의 본문이 이 뜻을 압축합니다. 이 복음서의 첫머리에 적혀있듯이 “태초에 말씀이 [...]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신데, 그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매우 어려운 구절입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말씀’으로 옮겨진 이 낱말의 그리스어 원어는 ‘로고스’(logos)입니다. ‘이성’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낱말을 ‘말씀’(the Word)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한지, 요한복음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여러 논의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옮기기보다 아예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고 옮기자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성’이라는 뜻으로 옮긴다면 일반인들에게 터무니없이 더 복잡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해서, ‘말씀’이라는 낱말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듯합니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행사하는 위력과 권능을 이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곧 그 위력과 권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도 ‘말씀’입니다. 그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인간을 다스리십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바로 그]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돋보이는 점은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데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성육신’(成肉身)이라는 기독교 교리를 말합니다. 높은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 누추한 이 땅의 사람으로 낮아지셨다는 뜻입니다. 문제 많은 모진 이 세상, 불의와 위선이 사납게 득실거리고 거짓과 그름이 거칠게 날뛰며 술수에 능한 자들이 어지럽게 춤추는 이 추악한 세상, 캄캄하고 각박한 이 삶의 현실 속으로 그가 오셨습니다. 이 현실 세계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를 주님으로, 그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교활하고 잔인한 세상의 회유와 횡포에 무릎 꿇지 않고 맞서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는 주님은 바로 이 세상 속에서 사신 분입니다. 그는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 삶에서 그는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다 겪으셨고 온갖 비웃음과 온갖 업신여김을 다 받으셨습니다. 인간의 사악함과 교활함 때문에 그는 고초당하셨습니다. 채찍을 맞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보다 더 놀라운 ‘자기 겸허’가 어디 있으며,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말보다 더 가슴 뭉클거리는 ‘자기 참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요한복음서의 이 표현은 단순히 주님이 표상한 강렬하고도 장엄한 생명력을 일컫지 않습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내려오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그의 삶과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도 마땅히 이 세상 안에서 그의 생명력을 구현하고 알려야 한다는 거부할 수 없는 억센 가르침입니다.


4. 맺으며:

그러므로 그를 믿고 따르는 예수의 사람은 이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등지고 사사로운 골방으로 들어가 자기 안일을 일삼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적극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은 세상 사람들을 닮아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남 속이며 거짓되게 살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정직하고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웃을 나 몰라라 하고 좁은 자기 공간으로 뒷걸음쳐 자기 평안만을 꾀할 때, 믿는 사람은 주님이 사신 그 삶의 길 따라 이웃을 위해 공공의 삶터로 들어갑니다. 공동체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삽니다. 우리가 ‘신앙 고백’하는 대로, 이러한 삶이 ‘자기/집안 챙기기’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사람의 믿음이고 개신교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귀찮고 고달프며 두렵기조차 합니다. 간교한 세력이 앞을 가로막고 악랄한 권력이 채찍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그의 일을 합니다. 함께 부를 마르틴 루터의 찬송처럼, 그의 뜻을 따라 일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강한 성이시고 강한 성이 되십니다. 방패와 병기이시고 방패와 병기되십니다.


<기도>

하나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으로 내려오신
그 겸허를 본받고
우리와 함께 사신
그 참여를 본받기 간구합니다.

주님,
이 삶의 길에
함께 해주시기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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