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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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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신

제목


‘은혜’, 우리에게 무엇인가?
본문 출애굽기 33: 19, 에베소서 1: 3-6/ 찬송 24, 185, 375/ 교독 22 (시편 96편)


1. ‘은혜’라는 말:

교회에서 자주 쓰고 자주 듣는 말 가운데 ‘은혜’(또는 ‘은총’)라는 말이 있습니다. 찬송할 때나 기도할 때도 빈번히 만나는 낱말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입에 올릴 만큼 예사로운 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 없이 적당히 얼버무리지 못할, 성경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낱말입니다.

우선 이 말을 뭉뚱그려 풀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듯이 자격이 없음에도, 벌을 받아 마땅함에도 하나님이 선을 베푸신다고 할 때 ‘은혜’라는 말을 씁니다.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 ‘은혜롭다’고 하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심이 많[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에게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라고 간청한 다음, ‘우리’가 이를 데 없이 “고집이 센”(쉬운성경), “목이 뻣뻣한”(개역개정판) 백성이지만 ‘우리’를 ‘주님의 백성으로 삼으소서’하고 간구합니다(출애굽기 34: 6-9). 이처럼 고통과 비탄에 빠진 백성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신다고 할 때 그를 ‘은혜로우시다’고 부릅니다(시편 103: 8). 우리는 이 은혜의 ‘이해 전통’에 이어, 눈먼 사람이 예수님에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간구하여 눈이 밝아진 일(마태복음 9: 27-30)과 같은 사건들을 ‘이해’합니다. 이같이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선한 도우심과 돌보심을 말합니다. ‘은혜’는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듯이, 은혜의 중요성은 다만 이 낱말의 잦은 쓰임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들붙어 세상에 이끌려 산 ‘노예의 삶’을 어쩌지 못할 삶으로 여겨 이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이에 맞추어 묵묵히 복종해온 우리의 종살이에서 불러내시어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 삼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이고, 은혜 때문이라는 이 낱말의 뜻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이름으로 쓴 편지의 첫머리 인사와 마무리 기도에서 빼놓지 않고 ‘은혜’라는 말을 쓰고 있는 데서, 우리는 이 낱말이 지닌 뜻의 무게와 힘을 새삼 느낍니다.

이 시간, 본문에 터하여 이 은혜를 함께 다시금 새겨보면 합니다.


2. 알 수 없는 은혜:

몇 주 전에도 함께 생각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노력한다 한들 공을 쌓는다 한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자기 죄를 뉘우쳐 사제에게 고백하여 용서받겠다는 의례를 아무리 엄히 지킨다고 해도, 조상을 신으로 믿어 정성을 담아 그에게 음식을 바치는 제사를 아무리 잘 치른다고 해도, 소원을 빌면서 어느 대상을 향하여 무릎 꿇고 절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그러한 노력으로 인간의 근본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은혜는 이러한 의례와 예절, 수행과 무관합니다. 은혜는 인간의 공적이나 선행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고, 이를 통하여 거드럭거릴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봉쇄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특권과 지위,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의 조건 모두를 깡그리 무력화합니다. 타고난 것이든 이룩한 것이든 인간의 잘난 체함과 뽐냄일랑 남김없이 모두 쓸모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은혜의 위력을 능가할 위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혁의 선구자들은 성경을 파고 들어가 이 진리의 정체를 다시 간파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뽑히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 오직 그의 은혜 때문이라고 외치며, ‘오직 은혜’라는 개혁의 깃발을 높이 내걸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빚어진 ‘새 피조물’입니다. 택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변화를 일구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지으시고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입니다.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이사야 13: 11). 그는 ‘전능자’시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사도행전 10: 36)시고,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디모데전서 6: 15). 모든 것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점을 밝혀두기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러주신 말씀(출애굽기 33: 19ㄴ) 곧,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신 말씀을 힘주어 다시 일러줍니다(로마서 9: 15).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단독으로 결정하십니다. 인간은 그의 일에 참견할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와 불쌍히 여기는 자를 마음대로 정하십니까 하며,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고, 부당하시다고 항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의도에 맞춰 일하시는 인간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준과 각본에 따라 움직이시는 인간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지으시고 이를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관자시고 우주의 주권자십니다. 그가 어떻게 판단하시고 어떻게 결정하시든 그것은 모두 그의 몫입니다.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창조주에게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며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하지 못합니다. 왜 누구누구는 자녀 삼으시고 누구누구는 자녀 삼지 않으시는지, 왜 누구누구는 그렇게 살게 하시고 누구누구는 이렇게 살게 하시는지, 마음에 차지 않고 마땅하지 않다고 해서 그에게 가타부타할 근거와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날을 배반하며 사는 주제에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며 대들겠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불평하며 항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무릇 인간이란 자기 눈으로 자기 생각으로 인간과 인간사를 사사로운 치우침 없이 바르고 고르게 재어 최종 판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정대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올곧게 열심히 살았는데 어째서 자기처럼 올곧게 살지 않은 사람이 자기가 당하는 어려움을 겪지 않는가 하고 오만 불평과 불만을 다 쏟아낼 수 있을 만큼 공평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언제나 자기중심입니다. 늘 자기는 옳고 남이 그르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남보다 더 열심히 살고 올곧게 살았다고 판단하고 확언할 수 있으며, 어떻게 남보다 삶의 혜택을 더 누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자기가 뭐라는 듯이 설쳐댄다면 이는 방자함과 우악함의 마음보를 드러내 보여주는 뻔뻔한 인간의 드센 치졸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깊이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머리와 마음으로 명쾌하게 다 풀이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인간이 범할 수 없는 하나님 고유의 세계가 있다는 절대자의 불가사의함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빼어나다고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수준으로 온전히 올라서지 못하고 아무리 엄청나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알 수 없는 그의 뜻에 따라 결정하고 판단하시며 그의 뜻에 따라 역사를 다스리시고 이끄십니다.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하나님은 그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펼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지극히 신비스런 높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일 따름입니다.  


3. 은혜의 뜻하심: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 은혜로 우리가 ‘믿는 사람’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예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으로 돌아가 말하면, 하나님이 즐거이 바라시는 그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1: 5).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바울이 고백한 것(고린도전서 15: 10ㄱ)과 같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믿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시고 하나님이 먼저 아신다고 한 지난 주일 설교와 대화 모두, 오늘의 본문에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1: 3).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일찍이 “택하사” “흠 없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뜻이 있었기(1: 4)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1: 5)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하여 미친 듯이 날뛰지만 믿는 예수 사람은 그러한 수준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흠 없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 살도록 택하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세상의 ‘선행’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사시면서 가르쳐주신 그 ‘선한 일’을 하도록 뽑히어 ‘새로운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모름지기 주님을 따라 길 떠나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그러한 삶의 목표, 그러한 삶의 뜻, 그러한 삶의 지향성을 가지고 삽니다. 이는 세상에 빌붙어 살 수밖에 없던 비천한 우리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어떤 값도 치르지 않고 우리가 거저 선물로 받게 된 “그의 은혜”에 감동하고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할 뿐입니다(1: 6). 이 감사와 찬송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화답’입니다.


4. 맺으며:

여기 새겨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의 은혜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 받아 믿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우리는 이 은혜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찬양을 방해하는 것들 때문입니다. 부모가 방해하고, 선생이 방해하고, 친구가 방해하고, 교인이 방해하고, 목사가 방해합니다. 집안이 방해하고 학교가 방해하고 사회가 방해하고 교회가 방해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자기’입니다. ‘말씀’보다, 주님보다, 교회보다 문제투성이인 ‘자기’--조절하지 못하는 자기 성질, 살피지 못하는 자기 기질—, 이 자기가 자기를 방해합니다. 온 데 퍼져 득실거리는 인간의 사악함과 어리석음과 불의함이 방해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은혜받은 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우리의 자녀가 은혜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라지 못하고, 우리의 공동체가 은혜받은 하나님의 공동체답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제도 기도하고 오늘도 기도합니다. 그리고 내일도 기도합니다. 잘못된 길로 빠져들곤 하는 우리의 거짓됨과 연약함을 말씀에 비추어 살피며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 10)하고 기도합니다.


<기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타락의 역사를 지닌 우리를,
거짓된 행실을 일삼는 우리를
알 수 없는 은혜로
주님의 딸과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이 은혜로운 삶의 기회,
우리 맘대로 저버리지 않기
원합니다.

이 은혜로운 삶의 길,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걷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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