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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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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신

제목


교회, 어떤 희망인가? (신년 주일)
본문 시편 28: 9, 에베소서 4: 13-20/찬송 58(이 날은 주의 정하신), 358 (아침 해가 돋을 때), 505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교독 67 (신년 예배)  


1. 교회 생각:

2023년 새해를 맞았습니다. 또다시 선물로 받은 새해 첫날, 첫 주일, 공동 예배 시간에 이렇게 우리가 ‘예수 사람’으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을 부르고, 함께 ‘신앙고백’하고 기도하고, 함께 ‘말씀 증거’에 동참하고 연보 드리는 순서도 갖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제가끔 지난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말씀’의 오묘함과 웅대함 그리고 그 다차원성에 어울리게 ‘공동설교자’ 네 사람이 돌아가며 맡는 그날의 ‘말씀 증거’를 교우들은 어떻게 받아들여 자신들의 삶에 이어놓는지, 진지하고도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함께 생각을 나누며 대화합니다. 우리 교회가 스물한 돌을 넘기게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배에 더하여, 나눔과 사귐과 대화 시간에 모두가 마음 문 열고 열성으로 참여하면서 우리 교회의 기틀이 이마만큼 잡힐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교회 전통과 관행을 귀히 여겨 이를 존중하며 참된 뜻에서 누리기에는 우리의 마음 밭이 너무 좁고 얕습니다. 우리의 됨됨이가 너무 거칠고 너저분하기도 합니다. 능력은 결핍되고 품성은 척박합니다. 한없이 낮추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모자람일랑 건성으로 보고 하찮게 여깁니다. 자기가 맞고 옳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남에게서 보는 ‘틀림’과 ‘그릇됨’이 자기 안에는 없다고 쉽게 단정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자유롭고 열린’ 교회라며 조야한 생각들을 마음대로 방출해대는 자기 독선의 놀이 공간으로 착각하여 무례한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지나칩니다. 아니, 틀렸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함께하여 시간을 허비할 만큼 공동체 구성원의 나날이 한가롭지 않습니다. 교회는 교회이고, 교인은 교인입니다. 교회는 ‘성도가 교통하는’ 하나님의 집이고 성도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신약 본문은 한해 전 ‘새해 예배’ 때 “새 사람을 입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바로 그 글귀가 나오는 본문 앞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중심으로, 교회다움과 교인다움,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이음새를 다시 함께 새겨보면 합니다.


2. ‘다른’ 삶, ‘새로운’ 삶: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의 틀에 매여 ‘세상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건져내어 ‘해방’된 참 자유의 사람으로 참된 복을 누리며 살도록 이끌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예수 사람’이라면,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의 뜻을 따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삶의 지향성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의 바로 체제 밑에서 짓눌려 살던 노예의 삶과, ‘출애굽’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살게 된 해방의 삶, 이 두 삶은 뜻과 지향성과 방식에서 같을 수 없습니다.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전의 종살이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뜻에 따라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지녀야 했습니다. 바로 체제 아래서 그가 일러주는 대로 먹고살기의 생존 문제를 급선무이자 유일한 삶의 가치 목표로 여겼던 이전의 낡은 삶의 지향성과 삶의 방식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에 따라(출애굽 20: 1-17) 그를 섬기며 그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삶의 지향성과 삶의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체제의 압력 밑에서 세상이 일러주는 대로 오로지 먹고살기의 일을 가장 절박한 삶의 가치 목표로 삼고 거기에 몰입하여 살던 이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존재하고 생존한다는(로마서 11: 36) ‘새로운’ 삶의 가치 목표로 대체되었습니다. 믿음 이후의 삶은 믿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뜻과 지향성과 방식이 그렇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사경회 때 우리 교회에서 함께 공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이 점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믿는 사람은 믿기 이전의 자신과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여 그의 다스림을 받는, 새로운 삶의 뜻과 새로운 삶의 지향성과 방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 성숙한 그리스도인:

그러나 인간은 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믿음의 길로 들어섰다가도 주저앉기도 하고 아예 길 걸음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믿음이 옹골지게 다져져 든든해지지 않고 부실하여 가던 길을 포기하고 곁길로 들어서고 뒷걸음질 칩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으로 돌아가 그의 표현을 따라 말하면(14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어린아이’ 같이 미숙해져서입니다. 성숙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해지면,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집니다. 온갖 “풍조에 밀려 요동”합니다. “파도에 밀려 떠다니는 배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쉬운성경).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다음에도, 이처럼 성숙해지지 않고 미숙한 어린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미숙한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권면했습니다. 그 권면은 우리를 향한 권면입니다.

성숙하지 못하여 미숙한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면, 뻔한 이단이 내뻗는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흔들려 그러한 데 끌려 들어갑니다. 그러나 속임수와 유혹은 바깥에서만 오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도 움터나옵니다. 자기의 이해관계와 이해타산, 자기의 욕망과 성격, 자기의 판단과 감정을 앞세우는 인간 본성이 기승을 부리게 되면 거기에 휩싸여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아는 일에 일심으로 연합하고 전념하지 않으면(13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12절)에 헌신하지 않으면, 한 마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안과 밖에서 불어닥치는 속임수와 유혹을 막지 못하고 이에 휘둘려 왔다 갔다 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리지 못하고 미숙한 어린아이가 되는 우리의 믿음을 바울 사도는 문제시했습니다.


4. 교회의 자리: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되풀이됩니다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아는 일에 일심으로 연합하고 전념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한다는 삶의 문제를 두고 함께 생각을 나누며 함께 배우면서 서로 북돋우어야 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어디서 해야 합니까? 교회에서 해야 합니다. 교회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집이고 성도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바깥 다른 어디에서 이에 버금하는 일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곧 ‘학교’라고 합니다. 세상 전제가 ‘성숙’한 사람을 키울 수 있는 배움의 마당일 수 있지만, 교회처럼 ‘인간의 성숙’을 중히 여겨 이를 전방위로 북돋우지는 않습니다.

피할 수 없이 모두가 들어서게 되는 가정이라는 첫 교육 기관에서 ‘성숙’한 삶을 불어넣어 ‘성숙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지만, 어떤 부모이며 어떤 집안이냐에 따라 ‘성숙’으로 피어나고 ‘미숙’으로 찌그러집니다. 오늘날의 가정과 오늘날의 부모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여기에서 성숙한 인간이 자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인간이 타고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가정에서 먼저 휘어지고 틀어지고 꺾입니다. 일반 학교에서 ‘성숙’을 북돋아 키워낼 수 있지만, 알다시피 외곬으로 입시와 취직을 위한 비좁은 수단의 지식만을 일방으로 채워주고자 하는 주입식 교육으로 단단히 굳어져, 사람으로서 온전히 갖추어야 할 폭넓은 삶의 ‘미덕’에 길들도록 심도 있게 가르치는 트인 교육은 일찌감치 폐기되었습니다. 학교라는 것이 ‘성취’와 ‘획득’을 위한 꽉 막힌 프로그램으로 학습자를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이따위 것에 의해 모든 것이 서열화됩니다. 놀이터에서 또래와 어울리고 일터에서 동료들과 부딪치면서 얻게 되는 배움의 기회라는 것도 이러한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를 더 굳힙니다. ‘성숙함’은 이들 모두에게 어색하고 낯선 낱말입니다. 어떤 적절성도 주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고 듣기도 거부”하고,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18-19절) 험하고 무정한 사회입니다.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미숙한 자를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게 하는 곳입니다. 이 천박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세상 흐름을 따르지 말고 이웃을 보살피며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리며 그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러한 뜻을 두고 함께 묵상하고 기도하고, 이러한 뜻을 증언하는 가르침을 익히고 이를 실행케 합니다. 이러한 삶의 요구와 책임 앞에 늘 자기 한계를 고백하며 더욱 온전한 삶을 향한 믿음을 다집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그러한 성숙함을 일러주고 증언케 합니다(15절). 이렇게 온전한 인간다움을 일구고자 합니다. 이러한 교회를 그리며 위대한 개혁가 칼빈은 교회를 믿는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는 어머니처럼 믿음의 사람을 ‘성숙’하도록 자라게 하고 키웁니다. 이 때문입니다. 칼빈은 “교회를 떠나는 것은 비참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5. 인간다움 일구기:

여기 물음이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이 땅의 교회가 그러한가? 교회가 세상의 조직과 제도가 추구하는 가치 목표와 달리 하나님의 선하심을 지키기보다는, 세상의 가치 목표를 흉내 내고 이의 박수부대가 되고 이중대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진정 이 시대가 요청하는 교회는 이 세상과 짝하는 세상에 속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이 세상과 대적하는 하나님의 집일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교회는 예배 공동체로서 자체의 존재 이유를 지키기 위하여 분투했습니다. 이를 위해 교인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규례도 만들고 기강도 세웠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어떤 규범, 어떤 질서, 어떤 방향, 어떤 관행과 전통도 없는 무풍지대거나 무법천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교회의 주인이 되고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고 이끄는 목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이끌어주십사 하고 겸손히 간구해야 할 뿐입니다(시편 28: 9). 그렇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숙하도록 자람을 불러일으킬 때, 교회는 희망입니다. 메마른 삶의 거친 들판에 하나 남은 희망입니다.


<기도>

하나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미숙’을 벗어나
‘성숙’하게 자라도록,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교회를
귀히 여기며 받들도록
신령한 은혜 내려 주시기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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