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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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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영신

제목


예수, 도성을 보고 우시다
본문 이사야 61: 1-3, 누가복음 19: 41-44/찬송 24, 359, 373/교독 47 (요한복음 15장)


1. '같이 느낌':

'공감'이라는 말,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생각과 견해와 감정에 같이한다는 느낌을 표현할 때 '공감'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와 같이 생각하고 보고 느낄 때 '동감'한다고 합니다. 두 낱말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서로 바꿔 쓰고 있고 그렇게 해도 괜찮게 들립니다. 전에 쓰던 ‘동감’이라는 말이 ‘공감’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오래 전 ‘동감’의 문제를 주의 깊게 살펴본 사상가가 있습니다. 경제학'의 창건자로 일컬어지는 아담 스미스입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동감'으로 풀이코자 했습니다. 사람이라면 남의 딱한 처지를 보고 딱하게 느낍니다. 이러한 느낌을 가질 뿐만 아니라 느낌의 됨됨을 평가합니다.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반응했는지 스스로 평가하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헤아립니다. 나아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규범에도 자신을 비추어 헤아립니다. 자기의 말과 행동, 생각과 느낌의 표현이 올바르고 알맞았는지 가늠하고 두루 헤아려 그 ‘적정성’을 살핍니다. 맥락에 걸맞고 어울리도록 자신을 다듬어 맞추고 바로잡습니다. 그렇게 '사회인'으로 빚어나갑니다. 아무리 자기 본위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동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 동물'인 한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스럽지 못한,' '사회성'이 없는, 정신이 건강하지 않다는 딱지가 붙습니다. 스미스는 이러한 '동감'의 능력으로 사회 생활과 사회 활동을 풀이했고, 나아가 시민다움과 시민 사회다움의 가능성도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독창성을 들어 그를  '사회학'의 창건자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동감'을 논한 그의 책을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서, 장로교 전통을 가진 스코틀랜드 태생의 글라스고우대학 교수가 성경의 가르침에 얼마나 기댔을까 하고 눈여겨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날 억압받는 서러운 자들을 위한 시위 현장에서 곧잘 마주하게 되는 구호판의 글귀, 곧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고 하는 말은 그가 말하는 '동감'의 좋은 본보기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터하여 이 문제를 함께 새겨볼 수 있으면 합니다.


2. 오심의 뜻:

성경에는 온통 '동감' 이야기로 넘쳐납니다. 바울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일러준 믿는 사람의 생활 규범이 다가 아니고 첫 보기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실 때 회당에서 두루마리로 된 성경 구절을 펴 읽은 이사야서(61: 1 아래)가 이를 말해줍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복음 4: 17-18/새번역).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를 이 땅으로 보내신 뜻이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있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그에게 내리신 까닭도 '기름'을 그에게 부어주신 까닭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물질로 어려움을 겪는 자를 이르고 사회에서 업신여김을 받고 괴로움을 겪는 자를 이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 가난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이 있는 사람을 고치시고 낫게 하셨습니다(마태복음 4: 23).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열병으로 시달려온 시몬의 장모도 고치셨고, 질병으로 신음하는 자들을 사람들이 데리고 나오면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셨[습니다]"(누가복음 4: 33-41). 질병과 고통을 보고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가엽고 불쌍하다고만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시고 아픔을 낫게 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신 이 일이 놀라운 '기적'이라면, 이는 병든 사람의 아픔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무감한 무리의 마음가짐과 너무도 다른, 일상인과는 실로 차원을 달리하는 그의 됨됨이를 드러내어 보여주고, 그의 동감 능력의 극대치와 완전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3. 우신 예수:

이처럼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면서 그들의 삶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바꾸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그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 20)는 삶의 조건 밑에서, 그는 섬김의 삶, 공공의 삶을 펼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향하여 바닷가에서, 길거리에서, 산에서 외치셨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마태복음 11: 17) 이 사랑 없는 도성의 냉랭함에도, 그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쉬지 않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편히 쉴 시간 없이 찾아드는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외로운 자들을 보듬으셨습니다. 그의 권위에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은 주님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해가 되고 독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를 해치고자 책략을 꾸몄습니다. 그를 아예 제거코자 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예루살렘 도성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저 아래 보이는 도성의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라는 계책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지 않고 그들을 달래어 부려먹을 궁리만 하는 무도한 기득권자들의 악독함과 잔인함, 이들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득권자들의 부스러기를 거두며 한통속이 되어버린 무지한 무리의 어리석음과 비굴함, 마침내 파멸하고 말 이 도성의 말로를 예수께서는 꿰뚫어보셨습니다. 겉으로는 무사하고 평온한 것 같지만 실은 살기가 등등한 막돼먹은 약탈자들의 천함이 득실거리고 야비함이 판치는 도성이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예수는 미어지는 가슴의 아픔에 북받치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이 도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그의 우심은 단순히 '동감'의 표현이 아닙니다. 남의 느낌에 동참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인간 수준의 동감을 넘어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삶에 들어와 온전한 삶으로 이끄시는 그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흔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교독문에서 읽었던 그 사랑,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신(요한복음 15: 9)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 10)고 하신 그 '사랑'입니다. 그의 우심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으로 표현한 동감이지만 이는 동감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가 우심은 동감의 ‘느낌’에서 끝나지 않는, 적극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참여와 행동으로 펼쳐나고 삶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신 그의 계명은 인간이 품은 ‘동감’의 적극화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에 잇닿아 있는 ‘자기 부정’의 사랑을 표상합니다.


4. 우리의 도성:

우리도 웁니다. 여러 까닭으로 웁니다. 하지만 보잘 것 없고 허술합니다. 제풀에 울기도 합니다. 남에게 무례히 행하면서도 억울한 쪽은 자기라며 주체하지 못하고 웁니다. 남을 위해 운다면 기껏 자기 식솔의 아픔과 어려움 때문일 뿐 그 너머 이웃의 어려움과 아픔은 눈 밖입니다. 장애인들이 교통의 편의를 요구하며 지하철 탑승 시위를 벌이자 도성의 거주민 다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하다며 시위 참여자들에게 마구 욕설을 퍼붓습니다. 거대 정당의 총수라는 자는 "수백만 서울 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다]"며 표를 가진 이들 다수와 한 편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다수가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를 세우겠다고 하면 집값 떨어진다고 아우성치며 반대하고, 그 지역의 국회의원은 표를 가진 이들 다수와 합세합니다. 우리 동네 이야기입니다. 가까이에 임대주택이 들어서고 신도시가 건설되면 집값 떨어진다고 공원에서 촛불 시위를 벌입니다. 이들은 제 잇속만 차리려는 물욕과 야욕으로 묶인 추잡한 '부동산 공화국'을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스럽게 떠받듭니다. '청와대'니 '국방부'니 하는 정치꾼들의 능한 말장난과 술수에 깔려 산불로 피해를 입은 동해안 사람들의 시달리는 고생과 고통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이야깃거리로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힘없다고 따돌림 받고 괴롭힘 당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편의 제공은 언제나 뒷전이고 그들을 위한 돈이라면 언제나 부족하지만, 저 교활하고 염치없는 힘 있는 자들을 위한 편의 제공이라면 언제나 먼저이고 그들을 위한 돈이라면 언제나 풍부합니다.

이 뻔뻔한 도성의 무감각함을 보시고,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예수 우시지 않겠습니까? 거할 곳을 얻지 못하고 배울 곳을 찾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집값 떨어진다고 안달복달하고 '세금 폭탄 맞았다'며 노기나 부리는 저 이글거리는 탐욕의 도성, 사나운 욕심의 광풍에 휩쓸려 속임과 거짓의 불의를 문제로 삼지 않는 이를 데 없이 비속하고 저급한 도성,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예수, 이 도성을 보고 우시지 않겠습니까? 옳고 그름의 문제는 덮어둔 채 우르르 몰려다니며 표를 몰아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광기를 난폭한 광기로 여기지 않고, 되는 대로 함부로 설쳐대는 이 뒤틀린 도성의 병든 거주민,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예수, 이들이 사는 도성을 보고 우시지 않겠습니까?

이 도성은 우리가 사는 도성입니다. 우리는 이 도성의 거주민입니다.  


<기도>

주님,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보이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의 예사로운 무관심을
흔들어놓으시고 숨겨놓은 탈취 욕망을
들추어내십니다. 그럼에도 전과 다름없이
무관심하고 탐욕스런 이 도성을 보고, 주님
우십니다.

우리도
울 수 있기 원합니다.
통곡할 수 있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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