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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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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석

제목


웃음의 힘
제가 또 이렇게 적습니다. 설교마다 생각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 설교의 주제였던 '웃음'이 마침 생각해오던 것인지라 느낀 바가 조금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과 삶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짧은 생각을 솔직하게 개진하고 선생님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부족한 점들을 바로잡아 갈 수 있는 이 공간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여기에 글을 올리게 될 때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항상 함께 올리고자 합니다.


1. 웃음의 의미 그 첫번째

말하기에 앞서 먼저 웃음의 과학적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웃음을 뜻하는 유머(Humor)라는 말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어 'Umor'(액체)에서 비롯됩니다. 이후 중세 유럽인들도 이 액체의 상태에 따라 사람의 감정이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도 유머는 '기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He is in a bad humor'는 '그는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웃음에 대해 최근 의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주립대 폴 애크먼 박사는 "사람은 특정한 감정 표현을 흉내내면 몸도 이에 따른 생리적 유형을 보인다."면서 "의식적으로 웃고 늘 웃음 거리를 찾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우니까 슬픈 것이고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기쁜 것이다.'고 말하는 이치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최근 뇌의학의 발달로 유머는 대뇌에서 이성적 판단을 주관하는 '이마엽'(전두엽), 기억 감정 등과 관련있는 '가장자리계'(변연계) 등 여러 부위가 함께 관여하는 복합적 두뇌 활동의 산물임이 밝혀졌습니다. 유머치료 전문가들은 이런 유머가 단순한 웃음 이상임을 강조합니다. 89년 미국 로마린다의대 리버크 교수팀은 웃을 경우 면역기능을 맡고 있는 백혈구와 면역글리블린은 많아지는 반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코르티졸 호르몬은 줄어든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또, 유머를 즐기면 다른 사람과의 유대감이 강화되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게 되며 행동양식이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등의 이점이 있다고 합니다.(이상은 제가 스크랩했던 동아일보 기사의 내용을 풀어쓴 것임을 밝힙니다.)

이렇듯 웃음에는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런 가치를 발견해서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은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이 땅위에서 어른이 된 그리고 되고 있을 사람들이 가지는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설교에서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말을 따른다면 윤리를 낳아야할 얼굴들의 만남이 외모마저도 상품으로 변모시키는 자본주의의 해악 때문에 변질된 결과 웃음이 상실되고 인간의 진정한 가치도 소멸되었다는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웃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숨기지 않고 계산하지 않아도 되었던 어린 시절 봄날 꽃망울 터지듯 터쳐나오던 웃음을 다시 가지는 것.-니체는 "무릇 심오한 인간은 가면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가면을 존재의 본질로 인정하기보다 더 이상 벗겨낼 수 없는 원형의 순수한 존재를 믿고 그것을 추구해 가는 삶이 옳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어린 시절의 웃음을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지나치게 함몰되었던 시각을 바깥으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인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내가 너무 아프다고 그 아픈 나만 바라본다면 관계를 맺고 있는 이웃을 향해 건넬 수 있는 웃음의 여지를 없애게 될 것입니다. 웃음의 의미는 타자-그 타자가 이웃이 되었든, 하늘에서 박수갈채처럼 떨어지는 싸락눈을 만드신 하나님이 되었든(이는 한세희 선생님이 한 말씀에서 따왔습니다.)-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또 역으로 웃음은 그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2. '웃음'의 의미 그 두번째

웃음은 개인적이고 소박한(?) 차원뿐 아니라 보다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연원을 살펴보면 웃음이 혁명하고 파괴하고자 했던 대상이 많은 부분 기독교에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하고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혼의 구원과 해방을 제공해야 하는 교회가 오히려 영혼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현실의 모순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동시에 얼마나 자신이 하나님 믿는 길을 간다고 할 때 깨어있지 않으면 안될지 각성케 됩니다.

아무래도 기독교가 해체의 대상으로까지 비판 받게 된데에는 중세의 형식화되고 경직화된 신앙이 큰 이유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함께 움베르토 에코가 쓴 소설 '장미의 이름'이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중세시대 한 수도원에서 원인 모를 살인사고가 연이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을 추적해 가던 윌리엄 수사는 결국 살인범을 찾아내는데 그는 바로 맹인 수사 호르케였습니다. 호르케는 수도원의 도서관에 보관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 희극론을 사람들이 읽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경건하고 근엄해야할 수도원에서 사람들이 희극론을 읽고 희희낙낙거리는 것을 신성모독이요 불경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책장에 독을 묻혀놓음으로써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저지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호르케 수사는 형식주의와 엄숙주의에 경도된 광신적 의지를 상징하며 윌리엄 수사는 그런 오류를 밝혀 웃음의 의미를 되돌리고자 하는 의지를 상징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웃음은 진리를 드러내는 길, 형식과 외식을 걷어내는 행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러시아의 문예 비평가 미하일 바흐찐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1493-1553)의 텍스트를 분석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라블레 작품에 등장하는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웃음은 삶의 현실을 왜곡시키는 모든 것들로부터 인간 자신을 해방시키는 힘이다.", "웃음의 원리는 폭음과 폭식을 수반하는 카니발(사육제)에서 비롯되며 카니발은 고착된 세계질서를 일시적으로 파괴하며 인간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발효제이다." 그 역시 사육제를 통해 웃음의 혁명적, 창조적 의미를 밝혔는데 사육제라는 것이 지속적인 신앙생활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기 보다는 일회적, 나아가 일탈적인 행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역으로 지속적이고 근간이 되는 신앙생활의 부박함을 고발하는 꼴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개혁을 외칠 수 밖에 없었던 교회의 타락-이는 웃음을 잃어버린 교회의 현실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도 결국은 본말이 전도되어 외양을 유지하는데 급급하게 된 신앙의 현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파고들어 이러한 기독교의 경건과 근엄의 기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따져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신이었습니다. 심판은 늘 인간을 두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도 못했습니다.

헤브라이어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 네 개 자음의 낱말 YHWH의 정확한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BC 3세기 이후 유대인들은 이 낱말 YHWH를 발음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 이름이 거룩한 지존자의 칭호이므로 함부로 발언할 수 없도록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신(神)의 보편적 주권을 강조하는 속성 명사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 Ginta)은 이를 ‘퀴리오스(Kyrios:주)’로 옮겼다. 유대인들은 이 낱말을 예배용어인 ‘아도나이(Adonai:나의 주)’로 읽었는데 그 모음 A-O-ai를 YHWH라는 자음에 그대로 연결해 읽을 경우 Yehowah(여호와/예호바) 등으로 엉뚱하게 발음될 수 있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여호와’라는 발음보다 야훼가 훨씬 더 원 발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름을 그들의 신론(神論)의 기초로 삼는다.‘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자’가 이 이름의 가장 정확한 의미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다. (두산동아백과사전)

연약한 피조물의 위치에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나친 결과일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이 인간을 쉽게 경직되게 만들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빠'의 이미지보다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근엄한 자세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긋나긋한 웃음, 허리가 꺾여지는 웃음 어느 하나도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경직됨을 풀고자 하나님은 그분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숙명과도 같이 내려진 단절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드리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분신이자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천박한 육신을 덧입고 이 땅에 내려와 모든 고난을 겪고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참 아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셨기에 하나님은 기꺼이 그 아픔을 감내하셨습니다.(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제 인간과 하나님은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단에 번제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불러도 될 것 같았습니다. 웃음의 천진함이 회복되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경직과 형식의 속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웃음이 배제된 근엄과 지나친 경건은 여전히 교회와 성직자들 가운데 존재했고 성도들을 억눌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왜 여전히 이런 모습들이 남아있어야 했습니까? 인간의 죄악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인간의 의식속에 있는 죄의식의 재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니체의 해석은 죄의식의 숙명적 원형을 상당한 정도 드러낸다고 봅니다. 그의 논리를 따른다면 하나님의 소중한 외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누구인지 묻는 물음이 인간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되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로 인간적 욕심에 의해 움직이는 성직자들에 의해 물어지며, 그들의 의도는 사람들을 예수를 죽인 살인자로 자인케 함으로써 교회에 반항하지 않는 성도를 얻고자 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분명 자신을 죽음의 고통에까지 몰고 갔던 인간들에 대해 복수하실 것이라는 엄청난 두려움이 심저에 깔리게 되고 이 공포심이 사람들에게서 웃음을 앗아가고 형식에 순응하는 개인을 양산해 낸다는 논리입니다. 결코 허황된 말은 아닌 듯 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왜곡된 의지는 이렇게 길들여진 개인을 보다 쉽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관료기계를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다양성과 풍부한 감성이 말살되고 오직 예측가능하고 따라서 통제 가능한 조직의 탄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수도원과 군대에서 비롯됩니다.-이는 아마도 베버가 말했던 바가 아니었나 기억되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껍질을 벗기 위해 니체는 '웃음'을 끄집어냅니다. 그 역시 웃음의 의미에 어느정도 공감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 여러번 죽어야 한다."(이사람을 보라; 274)와 같은 발언을 통해 개인 나아가 사회가 끊임없이 자신의 껍질을 벗고 생장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며 그 방법으로 '웃음'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좋았을 논지가 어떤 경계를 넘게 됨으로써 문제가 생깁니다. 그는 하나님마저도 웃음의 대상으로 올려놓음으로써 무신론의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웃음의 막대한 파괴력을 하나님에게 까지 적용하고 만 것입니다.(사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부정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니체를 이해한 결과가 그렇다는 것일 뿐입니다. 선생님들의 보충을 부탁드립니다.) 웃음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보다 신중히 '웃음'을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에게까지 혁명적 웃음을 드디밀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되며, 스스로도 모순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는 한에서는 분명 웃음이 가지는 혁명적 에너지는 긍정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심각한 인상을 펴고 웃어야 겠습니다. 웃음은 작게는 개인을 혁신시키고 크게는 사회와 국가를 혁신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지나갔던 자신의 행위 속에도 상당한 의미가 숨어 있었음을 되돌아 볼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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