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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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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되었습니다만 보고 삼아 여기 올려 나눕니다
<<시민다움, 시민으로 살기>>*

박 영신(경희학원)

* http://edu.donga.com/?p=article&at_no=20220623111333237863

* 지난 2022년 6월 28일,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1층 리사이틀홀에서 제가 '고황석좌'(임기 2년)의 이름으로 발표한 강연 원고입니다. 이 또한 여러분에게는 익숙한  내용입니다. '강연'과 함께 뒤이어 진행된 '대담'은 가까이 전자책으로 엮어 나온다고 합니다. <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니다>.  


1. 마주한 두 일:

2022년 봄을 맞을 즈음, 우리는 두 가지 일에 사로잡혔다. 하나는 5년마다 치르는 대통령 선거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벌어진 전쟁이다. 두 사건은 발생한 공간의 거리는 물론이고 성격도 두말할 나위 없이 다르다. 선거는 공직자를 뽑는 평화로운 투표 행위이고, 침공은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짓밟는 폭력 행위이다. 그럼에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모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다른 어느 선거보다 중요하다며 일찍부터 선거전의 열기를 뿜어 첨예한 정치의 양극화는 극을 향하여 치닫는다. 누구를 왜 선택해야 하는지, 이 선거는 자신에게 그리고 나라 전체에는 어떤 의미를 주는지 이모저모 새기며 마음속의 자기와 생각을 나누고 남들과 생각을 나눈다. 그렇게 내린 판단에 따라 결단을 내리고 투표권을 행사한다. 이와 함께,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중대사로 여겨 이에 눈을 떼지 못한다. 전파를 타고 곧바로 손전화와 영상수상기에 뜨는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끼인 피난민의 행렬과 포격당한 병원의 모습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자본이 그 나라에 깊이 진출하고 있다는 경제 수준의 이해타산에 머물지 않고 강대국의 잔학 행위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무수한 약자에 대한 느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왜 침공하였고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지키려 하는지, 이웃한 나라들은 또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며 도움에 인색한지도 뜯어본다.

이러할 때, ‘시민’으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또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민은 다만 선거 때만 권리를 행사하는 유권자도 아니고, 자기 나라의 일에만 마음을 쓰고 다른 나라 일에는 마음 쓰지 않는 국민도 아니며, 나라의 주인으로 자기 나라를 다스리고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는 인민만도 아니다. 시민은 모름지기 시민다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일상인’의 삶을 살펴보고, 이와는 결을 달리하는 ‘시민’의 삶을 알아본 다음 시민다운 삶을 들추어 그 됨됨이를 새겨보고자 한다.


2. 일상의 삶:

우리는 일상의 중압감에서 헤어날 엄두를 내지 않는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부터 잠에 드는 밤까지 챙겨야 할 일의 요구에 따라 삶을 짜야한다. 일에 얽매여 모두 바쁘게 움직인다. 일이 돌아가는 대로 삶도 따라 돌아간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과에 묶인 하루하루를 산다. 그렇게 쉼 없이 되풀이하다가 스스로 쳇바퀴 삶을 정상이라고 여기고 표준으로 받아들인다. 이 바퀴에 자신을 맡기고 자신을 던진다. 돌아가는 쳇바퀴에서 솜씨를 익히고 꾀도 짜낸다. 걸맞는 업적을 쌓고 이른바 성공을 거둔다. ‘빼어난’ 다람쥐로 인정도 받는다. 대기업 출신의 60살 신사 이야기이다. 그만이 아니다. 출퇴근 시간에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나날의 삶은 눈코 뜰 새 없다. 자신이 살기 위하여, 집안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쉴 틈 없이 일한다. 일과 삶이 떼어놓을 수 없게 하나로 엮여 더욱 바쁘게 살아야 하고 바쁘게 일해야 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바쁜 것이 아니다. 이들을 뒷바라지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또한 삶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유롭고 한가한 듯해도 그들이 돌봐야 할 집안 식구들의 일상에 발맞춰 재사스럽게 살아야 할 삶의 몫을 맡아야 하고 이를 제대로 해내야 한다. 아이를 낳아서는 육아와 학교와 학원 공부에 진학과 취직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가볍지 않다. 식구를 뒤에서 돌보고 돕는 일에서 재주를 떨쳐야 하고 능력을 키워야 한다. 산후조리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 만나 서로 정보를 나누며 자기 삶을 가꾼다. 모두가 ‘자기 개발’의 역군이 된다. 그들의 하루하루도 해야 할 일로 넘친다. 이렇게 쳇바퀴의 다람쥐는 집 안팎에서 등에 땀이 마를 겨를 없이 쉬지 않고 뜀박질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어떻게 풀이하고 이해하는지에 따라 일상의 삶이 다르게 짜인다. 일상인은 자신이 들어선 삶을 생존과 보존의 전쟁터로 받아들이고 자신은 그날그날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총탄이 빗발치고 포격이 날아드는 삶과 죽음의 갈림을 헤아릴 수 없는 피투성이 된 우크라이나의 어느 도시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나날의 삶을 급박한 순간의 연속이라고 풀이하고 거기에서 살아남는 것 이상 더 긴요하고 다급한 일은 없다고 이해한다. 일상의 삶터는 틀림없는 전쟁터이고 일상의 삶은 진배없는 전쟁이다. 이렇게 삶을 이해하다 보니 집요한 일상 집착의 삶을 정당화하고 치열한 일상 전투의 삶을 당연시한다. 이 삶의 걸음은 예외 없이 모두 자기 득세를 향한 진격이고 자기 이익을 위한 격투이며 삶은 이기고 앞서고자 하여 서로 겨루는 승부다툼이자 서로 싸우는 사생결단의 길 걸음으로 해석한다. 동료는 언제나 다퉈야 할 경쟁 대상이고 필요하면 거꾸러뜨려야 할 격파의 상대로 인식한다. 동료의 존재 이유는 자기 득세와 이익에 도움이 되는 가동 자원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맺는 관계는 모두 자기만을 위한 자기 위주의 관계로 짜놓아야 한다. 삶이 자기의 생존과 보존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 자신이 속한 관계는 모두 서로 맞서 겨루어 이기거나 지거나, 앞서거나 뒤서는 경합과 각축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회’ 관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다차원성과 다양성은 ‘경쟁’이라는 살벌한 관계로 단일화하고 획일화하여 삶 자체가 여지없이 축소된다. 관계의 망에 든 사람은 서로 돕고 도움 받으며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니라 서로 겨뤄야 하는 경쟁자이다. 모든 관계는 이처럼 ‘전략’의 관계로 자리 잡혀 있기에 늘 마주하는 일터의 윗사람과 아랫사람 틈에서, 그리고 이쪽저쪽 옆 사람 사이에서 겪는 긴장과 곤경은 모질 수밖에 없다. 동료는 이름일 뿐 실은 자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용의 대상이거나 자기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경계의 대상이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죽기 아니면 살기로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면서도 기어코 패권을 쥐게 된 격투 선수가 일상인의 인기를 누리는 현상은 바로 삶에 대한 이해의 공감대가 이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일상인의 자기 모습이고 자신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다. 삶의 쳇바퀴가 한없이 단조롭고 힘겨워도, 끝없이 삶을 찌들게 하고 찢어놓아도 거기에 자신을 맞출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다독인다.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고 해도 이 쳇바퀴는 들어서 있어야 할 현실이다. 힘들면 쉬면서 ‘여유’를 누리려 한다. 나라 밖으로 여행도 하고 주말이면 야외 나들이도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헬스클럽에도 열심이다. 그렇게 자기의 삶을 관리한다.

이러다 보니 일상의 삶 너머 다른 삶의 세계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 여지란 없다. 굳게 짜인 삶의 틀 안에 갇혀 다른 세계의 삶을 그리지 않고 그리지 못한다. 그것이 최상의 삶이고 유일한 삶이다. 다른 삶에 대한 생각은 현실 안주에 실패한 자들이 한가로이 벌이는 공허한 생각 놀이이거나 현실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부질없이 내뱉는 주제넘은 말 뭉텅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히려 핀잔 놓는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들어선 이 삶의 이점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생각이 멈춰있다. 더 열성을 떤다면 자기 삶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데 모든 열정과 힘을 쏟을 따름이다. 쳇바퀴의 ‘우리’를 벗어나려는 안목이나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데 마음을 열어두지 않는다. 이 모두는 자신이 빠져든 현실성 앞에 언제나 비웃음을 산다. 이 까닭에 이와 다른 어떤 삶의 가능성이란 모두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 ‘먹고 살기’에 여념이 없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들먹이며 이러한 삶의 지향성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들이 말하는 ‘먹고 살기’의 문제는 물론 침략군의 포격을 피하여 피난길에 오른 자들의 생존과 보존 문제와는 견줄 수 없이 호사스런 일상의 문제임에도, 예의 그 절박함을 부풀려 자기 삶의 다급함을 마음속으로 늘 강화하고 정당화한다. 이는 ‘더 배불리 먹고 더 여유롭게 살고자’ 하는 소비 증대를 향한 탐욕의 자기 과장과 자기 증폭에 지나지 않는 획득 문화의 반영이다.

이들 일상의 생활인에게도 투표 행위는 중하다. 자신의 생활에 직결될수록 정치 무관심보다는 정치 관심 쪽으로 기운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이로운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바람 때문이다. 그리하여 투표는 가볍게 여기지 못할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다지기까지 한다. 투표일은 쉴 틈 없이 세세히 짜인 일상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공휴일이다. 그에게 이 날은 경제 활동과 구별되는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날이다. 투표 이외에 별달리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도 않고 그럴만한 일이 없기에 모든 일이 다수결로 결정되는 민주주의 제도라 자신의 정치 의사를 표현할 실로 귀중한 투표권 행사의 날이다. 마땅히 이 권리 행사의 결과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이처럼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일상인이 행사하는 투표가 정치 참여의 모두일뿐더러 자신이 귀히 생각하는 자유도 이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않는다. 생계 수단을 잃지 않고 다져놓기 위해서는 자기를 몰아가는 거대한 체제의 삶을 어쩌지 못하는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대로 일할 시간을 조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삶의 자유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고 이러한 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것처럼 어리석은 삶은 없다며 삶의 능률성을 높일 궁리만 한다. ‘먹고 살기’라는 생존과 보존의 철책 안에 갇혀버린 부자유함에 대하여 깊은 물음을 던지거나 이에 맞서지 않는다. 숫제 둔감하고 무감하다. 오늘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면 오늘에 충실한 생활인이 되어야 한다고 벌써부터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더하고자 할 뿐이다.

일상에 묶여 사는 생활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 삶을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고 여겨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오로지 자기의 일에 몰입한다. 자기 능력을 개발하고 자기 이력에 윤기를 더하기 위해 자기를 관리하고 자기 자원을 배분한다. 이 관심의 테두리 너머의 세계는 자기와 무관하고 자기가 들어설 곳이 아니라고 아예 선을 긋는다. 삶은 자기와 자기 집안 식구에 집중한다. ‘사사로운’ 관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시간 내어 해외로 먼 여행을 떠나 넓은 세상을 구경하더라도 비좁은 의식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모든 것을 좁게 본다. 그는 ‘작은’ 사람이다. 오늘날의 상황을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문명 수준에 올랐다고 마구 뽐내지만, 자신도 “영혼 없는 전문가들, 가슴 없는 감각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기계화되고 화석화된 삶의 궁지에서 ‘영혼 없는’ 직장인으로 살고 ‘가슴 없는’ 표피의 인간으로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할지도 모르나 이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이들은 쳇바퀴 안에서 분주히 뜀박질하는 통상의 삶에 충실하다. 나날은 이들 다람쥐들에 의하여 언제나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3. 시민의 삶:

나날의 삶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 수도 있다. 쳇바퀴를 타고 빙빙 도는 다람쥐와 달리 또 다른 다람쥐는 넓은 들판의 잔디와 깊은 숲속을 넘나들며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고자 한다. 쳇바퀴를 타야하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 벌판의 잔디밭으로 달려가 함께 뒹굴며 뛰노는가 하면 숲속으로 들어가 햇볕 쬐는 어느 언덕바지에 모여 풀냄새 맡으며 함께 노래 부르며 춤추고, 도토리를 거두어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다. 토끼도 만나고 노루도 만나고 산양도 만난다. 혼자 쉬기도 하지만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 생각을 잊거나 저버리지 않는다. 쳇바퀴 안에서 부리는 재주가 다람쥐의 유일한 삶의 길이라고 여기지 않고 그러한 삶의 테두리 너머로 나아가고자 한다. 집안을 생각하고 일터를 귀히 여기지만 오직 먹고 살아야 할 경제 단위로 생각하지 않고 이기고 지는 경쟁의 마당으로 대하지 않는다. 삶을 그렇게만 보고 그렇게만 그리기에는 너무도 다양하고 다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인’과는 다른 삶의 길에 들어선 ‘시민’의 지향성이다.

일상인은 자기와 자기 집안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을 어찌할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여 이에 묶여 산다. 그러기에 일이 요구하는 삶의 짓눌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언제나 분주하다. 그러한 삶을 책임 있는 가장의 의무이고 직장인의 도리라고 믿는다. 주말에 겨우 시간을 내어 가족과 교외로 나들이 하거나 모자란 잠을 채우면서 직장 일을 위해 충전하고 재충전한다. 건강 유지를 위한 운동 시간을 마련해두는 여유도 가지고 취미 생활을 위한 시간도 짜낸다. 이 때문이다. 언제나 하루하루가 힘이 부쳐 다른 데 생각을 돌릴 짬이 없다. 그러나 시민은 이와 같은 일상의 틀 안에 갇히고 매이기를 거부코자 한다. 자기와 자기 식구, 자기 집안의 일에 충실하면서도 자기 바깥, 자기 식구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어떤 일에 자신을 잇대어 놓고자 한다. 일상의 삶을 무겁게 내리 누르는 조건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이에 자신을 맡겨 들붙어 살지 않고 이를 뚫고 나아가고자 한다. 일상인과 구별되는 ‘시민’의 삶이다.

우선 시민은 집 안에서 함께 나누는 이야기 세계가 일상에 얽매여 사는 일상인의 이야기 세계와 다르다. 이들은 아이들과 함께 거실에서 영상매체가 전하는 소식을 보면서, 식탁에 둘러앉아 후식을 나누면서 대통령 후보자로 나온 인물의 삶과 주장에 대하여 생각을 나눈다. 종교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이라는 말은 이 시민의 집안에서는 폐기된 지 오래다. 종교 이야기도 터놓고 나눌 뿐더러 정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다. 때때로 격한 논쟁도 벌어진다. 이러한 집안의 대화 과정을 통하여 가족 구성원 모두 자기를 조절하여 합리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마음바탕을 다지고 말버릇을 다듬고 말솜씨를 키운다. 생각을 나누며 말하는 방식과 태도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된다고 할진대 소통의 능력과 역량은 먼저 집안에서 만들어지고 길러진다. 이른바 집안의 화평을 깬다는 거북한 마찰이 일어난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이유를 들어 어설픈 강제력으로 개인의 양심과 가치의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피하거나 억누르지 않는다. 그것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서양 속담이 일러주는 바이기도 하다. 시민의 집안에서는 종교이든 정치이든 그 모두는 각각 골방에서 생각해야 할 ‘사사로운’ 영역에 속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내팽개쳐서는 안 될 열린 대화의 주제로 ‘공공의’ 영역에 속한 모두의 논의거리라고 생각한다. 이 모두는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생각하고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야 할 삶의 문제와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시민의 집안에서는 이러한 올제의 세상을 일궈야 할 일에 뒷짐 지고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시민 가풍과 습속을 다지며 이를 체험하고 실행한다.

지역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 집안 이야기이다. 다른 나라로 비행기 타고 여행 떠나는 날이었다. 앙골라 정부의 콩고이주민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온 가족이 인천공항 대기실에 여러 날 머물고 있다는 뉴스를 공유하고 있던 차였다. 이들은 그저 한국이라는 나라가 난민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는 정보만 손에 넣고 급하게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난민과 함께 살기>모임이라는 작은 시민 운동체에 회원(모람이라 부른다)으로 참여하고 있던 터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전할 겸 준비한 선물과 카드를 들고 그들을 찾았다. 그렇게 만났다.

만남만이 의미 깊지 않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집안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앙골라와 콩고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했고 무엇보다 난민에 대하여 생각을 나눴다. 한 해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음 이들 난민 가족은 정착했고 지난해에는 정식으로 난민 인정도 받았다. 벌써부터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온 낯선 이름의 아담, 유스라 도르카스, 아미야타, 야무드 가족들과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이 모람들은 “좋은 이웃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정착한 난민 가족과 지난 4월에 화상모임으로 만나기도 했고, 인천공항에서 만난 모람이 쓴 시도 다시 함께 읽을 기회가 마련되었다. “인천 공항 46번 게이트// 그의 집 주소-엄마, 왜 여기서 살아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넘어가지 못하는/ 나라의 선”하고 읊었던 시다. 난민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색한 나라를 향해 난민임을 증명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애처롭고 고달픈 난민의 삶과 범세계화 시대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잔인하고 비정한 국경의 현실에 대해 이 시를 쓴 모람의 집안에서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지 우리는 넉넉히 짐작한다. 일상에 쪼들리며 일상에서 한 치도 밖으로 내딛지 못하는 일상인의 삶에서는 볼 수도 그릴 수도 없는 이 시민의 삶에서, 어른들은 ‘좋은 이웃됨’을 되새겨보았고 아이들은 ‘좋은 이웃됨’을 두고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웃으로 살아야 하는 ‘이웃다운 삶’을 함께 생각하고 새긴다. 그리고 코로나로 대면할 수 없게 되자 화상모임으로 만나 이곳에서의 삶 이야기를 듣고 느낌을 나눈다. 앞에 말했듯이, 낯선 이름을 가진 난민들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모람들의 이야기는 한 가지가 아니다. 절기 때면 이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식탁을 나누고 아이들은 같은 방에서 잠자며 주말을 함께 보낸다. 부모는 이들을 위해 먼 길을 운전한다. 오가는 길에서 그리고 식탁에서 아이들의 침대 방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통상의 틀에 붙박이인 꽉 막힌 일상인들의 삶에서는 전혀 그려볼 수 없다. 일상인과 다른 삶의 지향성을 지닌 사람들을 나는 시민이라고 부르고 이들의 삶을 시민의 삶이라고 본다.  

자기와 자기 집안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넓은 관심을 지닌 부모와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아이와 다르다. 진학과 입학과 학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부모의 등쌀에 제대로 자기를 살리지 못하는 집안 아이와 결코 같을 수 없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마음을 쓴다. 러시아 군대가 퍼붓는 폭탄에 맞아 죽고 포탄으로 살 수 없게 된 폐허의 도시를 뒤로 하고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피난 행렬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기만 하는 일상인의 집안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의 어려움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아픔을 마음으로 그린다. 자기 나이 또래 피난 어린이가 겪을 추위도 느끼고 배고픔도 느낀다. 마침 그들이 속한 교회에서 우크라이나를 돕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선뜻 자기 적금 통장에서 돈을 꺼내어 보태겠다고 한다. ‘좋은 이웃됨’을 두고 이야기 나누고 익힐 수 있는 시민 집안의 아이는 시민으로 자란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는 걸음에는 두터운 소통의 과정이 있다. <난민과 함께 살기> 모임이나 교회 모임을 통하여 좁은 삶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모임의 카페나 홈페이지를 통하여 여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의 기회도 갖는다. 화상모임으로 만나, 지난날 난민으로 공항에 머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네 나라로 가!’ 하고 소리 질렀다는 ‘가슴 아픈’ 기억이나 전철을 타면 ‘자기 옆에 앉지 않으려는 모습’에 ‘상처’받은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이웃으로 살아야 할’ 우리의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새긴다. 소통의 습속을 익히기란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다. 소통 자체가 순조롭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고 하더라도 소통의 가치를 중히 여겨 조금씩 나아지도록 서로 애쓴다. 소통의 첫 배움터는 집안이다. 집안에서의 소통이라고 해서 쉽다 할 수 없다. 하지만 시민의 집안에서는 참여를 북돋우어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게 모두에게 기회를 열어둔다. 일방이지 않다. 억지로 정답을 만들어 밀어 넣거나 단답형으로 짧게 답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좋은 이웃으로 살기’를 두고 어른과 아이들이 막힘없이 생각을 나누고 또 나눠야 할 따름이다. 시민의 삶은 이와 같은 생각 나눔의 이야기에서 다져진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자기 집안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집안의 대화는 먹고 살기 문제에 고착되지 않고 입학과 진학과 취직 문제에 고정되지 않는다. 집안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이웃한 남들에 대한 관심으로 뻗어나가 공동체의 문제로 이어진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대화 속으로 끌어들여 그들과의 관계 속에 자기를 자리매김한다. 그렇게 자기를 넓히고 삶을 새긴다. 이러한 삶의 지향성은 집안에서도 이뤄지고 집안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시민 운동체를 통해서도 이뤄진다. 개인은 고립되거나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시민 모임과 연결되어 움직일 때 더 큰 힘을 받는다. 물론 그 모임이 자기 이익이나 자기 개발을 더하려는 뜻을 가진 곳인지, 자기를 넘어 공동의 선을 위하여 서로를 돌아보며 돌보는 일을 부추기는 곳인지에 따라 행동 지향성을 달리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4. 시민다움의 길: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더불어 서로 느낌을 주고받으며 함께 돌보며 기대어 살 수 있는 마음가짐은 삶 속에서 익히고 다져야 할 시민다움이다. 이와 같은 삶의 지향성을 가지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선을 위한 일에 참여할 수 없다. 시민은 사사로운 좁은 삶의 우리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이를 벗어나 넓은 공공의 마당으로 나아가 공동의 선을 위한 일에 동참하려는 열망을 품고 산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혼자일 수 없는 이 삶의 터전에는 자기만 존재하지 않기에 이에 참여하는 삶을 자연스럽고 마땅하게 여긴다.

‘합리스럽게’ 손익을 계산하는 개인으로만 바라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온당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경제학에서조차 관심을 끌고 있는 까닭이 이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소비 문제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나’와 ‘너’를 떼어놓지 않는 ‘관계’를 도외시하지 못한다. 나아가 상품을 팔고 사는 교환의 관계를 아무리 중히 여긴다고 해도 모든 관계를 그러한 수준으로 끌어내리거나 줄일 수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삶이란 다양하고 다차원이다. 관계의 차원 또한 그러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담 스미스를 이해할 때 자칫 그의 「국부론」에서 논한 생산과 소비 문제에 사로잡혀 이보다 먼저 그가 「도덕 감정론」에서 ‘동감’의 원리를 논하면서 이 원리로 인간의 도덕 감정을 풀이코자 한 생각의 배경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생각을 균형 있게 이해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보는 어리석음의 지름길이다. 시장의 관계도 서로의 형편을 느끼며 반응하는 ‘동감’의 관계와 떼어놓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상거래조차도 이의 밑바닥을 떠받치는 ‘공감’의 원리 위에 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다움은 바로 이러한 공감의 능력 위에 터 잡은 삶을 가리키며 시민 덕성은 바로 이러한 삶을 표상한다. 시민다움은 고립된 개인으로 삶을 엮어가지 않고 서로서로 느낌을 주고받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공동선을 위하여 기여하는 시민 덕성을 이르고, 먹고 살기의 욕구에 빠져 소비 욕망에 휘둘리는 삶 너머의 고양된 삶을 지향한다.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경제가 위력을 떨치게 되어 모든 것을 경제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잣대로 재기에 이르러, 인간 이해도 삶의 이해도 ‘경제화’하고 말았다. 인간은 ‘경제 인간’으로 다 풀이될 수 없는 다차원의 인간임에도 경제의 논리에 의하여 ‘다른’ 영역의 삶이 지닌 의미가 퇴색하고 그 삶의 값이 무시당한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모든 것을 돈으로 표시하고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그러해야만 쉽게 이해하고 반응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설득 구조는 돈으로 말할 수 있는 ‘상품화 능력’에 터한다. 물론 이는 산업화 이후의 창안물이 아니다. 재력이 위력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상품화의 유혹이 있었고 지배 세력은 이를 교묘히 활용해왔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재물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다. 재물을 더 많이 내면 더 효험 있다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구원의 상품화였다. 그때의 상품화가 더욱 저급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영역이 극히 제한되었던 반면에, 오늘날에 와서는 모든 삶의 영역이 상품화로 궤멸당하고 있다. 자연도 상품화되어 자연을 보고 감상하는 데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만만찮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정치도 상품화 경쟁을 벌인다. 서울 강남이 특혜를 받고 증폭시켜 땅값과 집값이 치솟을 정도로 모든 편익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다른 지역의 유권자들은 자기 지역의 ‘강남화’를 들고 나오는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후보들은 빼놓지 않고 ‘강남’ 수준으로 자기 지역을 개발하겠다고 공약한다. 자기 지역이 상품화하고 유권자가 상품화한다. 모두가 강남을 우러러보며 강남을 기준으로 ‘명품’ 지역, ‘명품’ 도시를 만들겠다고 다투어 호들갑떤다. 모든 것을 물질의 가치로 환원할 때에만 사람들의 마음을 분기시킬 수 있고 그것처럼 효과 있는 방책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보가 대통령 관저가 붙어있는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용산에 있는 국방부 건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겠다고 선언하면서 이사 비용 문제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국민들의 표심을 챙겨야 하는 정치꾼들은 소기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면 액수를 줄이고 늘이면서 국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교활한 술수를 쓴다. 이 점을 꿰뚫고 있는 꾼들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사 비용을 발표한다. 이사를 계획한 당선인 쪽에서는 4백억 정도로 이사 비용을 ‘발표’했지만, 반대당에서는 터무니없는 액수라며 몇 천억, 심지어 조 단위의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고 ‘발표’했다. 비용을 줄여 격할 수도 있는 국민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쪽과 비용을 늘려 반발할 수도 있는 국민의 감정을 부추기려는 쪽의 상충되는 두 가지 의도 때문에 돈의 액수를 줄였다 늘였다 하고 있는 셈이다. 마침 동해안에 산불이 번져 집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있는 탓에, 한쪽은 비용이 크지 않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비용이 크다며 돈에 민감한 국민의 지지를 확보코자 한다. 요즘에 일어난 정치 상품화 현상의 보기이다. 그만큼 경제 논리가 종교나 정치와 같이 그 나름의 논리가 있어야 할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 막강한 힘을 떨치고 있다.

면죄부라는 중세 교회의 상품화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킨 촉발 요인이 될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상품화 자체가 개혁 운동을 촉발하기는커녕 어떤 불만과 분노를 자아내지 않는다. 상품화가 만연한 홍수 속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어 어느새 이에 둔감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심 쓰는 문제는 상품화 자체가 아니라 돈의 크기이다. 국민은 비용의 크기에 민감하다. 대통령 집무실을 왜 옮겨야 하고 왜 옮겨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논쟁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이사 비용의 문제로 의견이 대립하고 충돌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해버린 통상의 틀에 얽매인 삶의 실상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공공선과 공공의 이익에 어떻게 이어지고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모두 돈의 크기 수준으로 내려앉고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시민은 이러한 상품화로 나타나는 삶의 비속화에 대하여 저항한다. 모든 것을 돈으로 풀이하고 돈으로 셈하는 삶의 단조로움을 문제시한다. 이러한 데 눈이 흐려져 상품화할 수 없는 공동체의 문제에 대하여는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 삶의 협소함에 물음을 던진다. 시민은 일상의 삶에 대한 성찰에서 잉태한다. 삶을 얽어매는 통상의 틀을 어찌할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잠잠히 순응하여 자기를 예속시키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차라리 비참하고 궁핍한 자기 굴종의 삶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꽉 막힌 삶에서 탁 트인 삶으로 들어서는 도약은 삶에 대한 의미의 전환이고 새로운 태도의 습득을 일컫는다. 일상인에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은 일상의 거부를 전제한다. 막스 베버의 생각에 기대어 말하면, 역사는 위대한 ‘카리스마’의 분출과 이의 통상화가 되풀이되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역사이건 집합의 역사이건 모두가 이러한 과정을 밟는다고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카리스마를 어떤 인물에 한정시키지 않고 어떤 상징을 포함하는 힘이라고 보면 어떻겠는가? 제도화된 통상의 틀에 묶인 삶을 일상이라고 한다면 이를 돌파하여 시민다움의 새로운 삶의 세계를 불러오는 변화의 계기는 카리스마의 분출에서 비롯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돌파는 평면의 지평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을 문제시하는, 일상과는 다르며 일상을 넘어서는 더욱 높은 어떤 위대한 ‘카리스마’의 상징이 분출하는 힘을 받을 때 가능하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초월의 상징이 곧 카리스마의 힘이다.

바꿔 말해, 초월 차원에 잇대지 않고서는 일상에 얽매인 삶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란 ‘땅의 도성’에 붙어산다. 이 도성의 삶은 탐욕이다. 일상이 주는 유혹에 빠져 그 안에서 즐거움을 지향하는 삶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비속한 수준에 머물러 살 수는 없다. 이를 벗어나야 한다. 그의 말로, ‘하늘의 도성’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의 도성’과 만나지 않고서는 ‘땅의 도성’을 넘어설 수 없다. 땅의 도성 다음에 하늘의 도성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도성 안에 살면서 하늘의 도성을 만나야 한다. 삶이란 이 두 도성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이 땅의 도성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삶의 지향성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이 도성이 궁극의 것이 아니고 최상의 것이 아니라는 삶의 실상을 비춰주는 더욱 높은 도성의 빛에서 온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이 ‘사회’를 비속함과 신성함 두 차원으로 이해하여 천한 것을 넘어서는 거룩한 것에 대한 관심을 끈질기게 잡고 씨름코자 한 까닭도 이러한 생각의 줄기에 이어진다. 집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자산이고 집을 제 일급 투자 항목으로 떠받들며 부동산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학교 교육으로는 부족하다며 사교육에 등록금을 바치며 학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교육 시장에 경쟁하며 뛰어들고, 대중매체 프로그램 곳곳에 올라오는 먹는 이야기와 ‘맛 집’ 이야기에 빠져드는 일상인과는 달리, 시민은 이러한 일에 빠져들지 않는다. 시민에게 그것은 비속한 삶이다. 시민은 그 수준을 넘어서는 공공 관심사를 더욱 뜻깊고 보람되다고 여겨 그러한 데 관심을 가지고 참여코자 한다.  


5. 시민다움의 힘:

이 시민다움은 어디에서 힘을 받을 수 있는가? 통상화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에너지의 밑바탕은 무엇인가?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보기를 들어본다. 
 
아메리카의 인종 차별 문제는 길고도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논의는 간단하게 서술할 수 없다. 그 가운데서 흑인 시민권 운동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은 지난 60년대를 앞뒤로 하여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비폭력 저항 운동이다. 이를 표상하는 그의 연설이 있다. 1963년 여름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하고 외친 연설이다. 내가 가르치는 수업 시간에 자주자주 학생들과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곤 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는, 흑인영가의 곡조에 실려 퍼지는 노랫말처럼 언제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연설문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꿈’은 아메리카 현실에 대한 서술이나 분석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바람이다. 이 꿈은 인종 차별로 엮인 현실의 완고함에 대한 멍청한 무지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백인 중심으로 짜인 현실의 강고함에 대한 순진한 착오에서 빚어진 것도 아니다. 그는 북부에서 최종 학위 과정을 마쳤지만 남부 태생이기 때문에 흑인이 당하는 수모와 백인이 가하는 폭력을 가까이에서 보고 체험하였다. 누구보다 인종 차별의 역사와 관행을 잘 아는 흑인 목사였다.

‘꿈’이라는 낱말이 천진난만한 미숙함을 연상시킬 수 있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내세에 대한 영성주의자들의 염원을 호출할 수 있으나, 그의 ‘꿈’은 바로 무도한 부도덕성과 그 위에 뿌리내린 차별의 구조 그 너머를 향한 가장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흑인의 자유와 백인의 자유는 뗄 수 없게 이어져 있다며 아메리카의 공동체성을 힘주어 전제한 다음, 자신이 가진 꿈은 엉뚱한 꿈이 아니라 아메리카 시민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아메리카의 꿈에 깊이 뿌리내린 꿈”이라고 한다. 자기나라 사람이라면 모두가 믿고 있는바 곧,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자명한 진리로 삼는다”는 믿음을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 “나의 네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는 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아직도” 이 꿈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 꿈은 킹 목사의 꿈이되 흑인 모두의 꿈이고 백인 모두의 꿈으로 확장되고 모두를 하나로 이어줄 수 있고 이어주는 꿈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의 ‘꿈’은 자기 나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그 '꿈’은 현실의 어떤 이념이나 체제와 동일시하거나 등식화하지 않는다. 현실과 일정한 비판의 거리를 유지코자 하는 상징 차원의 힘을 표상한다. 이 ‘꿈’에 터한 그의 시민 정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상징하는 ‘사랑’의 뜻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가는 과정이었고, 이 참여는 피할 수 없이 현실 체제와 긴장하고 대립하는 변혁 지향성을 뿜어내었다. 그의 꿈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의 한계를 들추어내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내면의 책임감과 의무 의식의 표명이었고, 현실의 삶을 바꾸고 다시 짜야 한다는 시민 참여의 당위성과 헌신의 개진이었다. 이 점에서 그가 말하는 꿈은 집합 열망이자 현실 돌파의 지렛대이고 현실 초월의 받침대였다.

아메리카의 체제 밑에서 일어난 시민권 운동처럼 공산주의 체제 밑에서도 ‘시민권 운동’이 일어났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역사의 계기는 1975년 아메리카와 소비에트 연방국을 비롯한 35개국이 서명한 ‘헬싱키 협정’이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인권을 존중하는 국제법상의 근거에 모두 합의했다. 이른바 동서의 화해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소비에트 연방국의 통제 아래 있던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시민의 참여 문제를 들고 나온 인권 단체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서 체코슬로바키아의 <’77헌장> 운동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운동의 한복판에 바츨라프 하벨(1936-2011)이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당국에 의하여 수감된 이력을 가진 체코의 반체제 저항자로, 탈공산화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현대판 ‘철인 정치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또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를 거부한 그 나름의 꿈을 품고 살았다.

그가 남긴 글 속에는 깊이 묵상해야 할 많은 주제들이 있다. 공산 체제에 한정된 주제들이 아니다. 만일 그러하였다면 소비에트 체제가 몰락한 오늘에 와서는 그 중요성과 함께 적절성도 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제들은 체제를 넘어서서 인간의 삶을 관통하여 삶 자체를 새김질하게 한다. 가장 인상 깊은 주제는 현실에 근거하되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 차원에 대한 관심이다.

현대 문명이 이룩한 업적은 엄청나다. 인간에게 주체하지 못할 부를 선사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편리를 제공해주었다. 모두 이에 휘두름을 당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빠져 그 수준에 집착하며 그 수준에서 갈등하고 쟁투한다. 목적 또한 그 수준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화하여 그것 너머의 것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어떤 가치도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다. 가능한 것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뿐 다른 모든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 관심의 대상 밖으로 밀쳐 내버린다. 그 너머의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가능한 현실에 얼굴을 파묻는다. 하벨의 말로 표현하여, ‘절대 지평이라고’ 했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가볍게 다뤄진다. “참된 덕, 참된 책임, 참된 정의, 참된 사물의 의미, 이 모든 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근원에서 떨어져 나와 버린 탓이다. 모두 현실에 맞춰 살기에 바쁘다. 얕고 천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창조주가 인간에게 자유의 권리를 주었다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만 주장할 뿐 그 자유를 주었다고 하는 ‘창조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그와 맺고 있는 관계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빠져든 편협함이며 표피성이다.

인간은 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의 말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야 한다”. 낮은 차원에 붙박이 되어 현실에 안주하는 삶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정치도 이러한 생각에 잇닿아 있다. 정치가 ‘가능의 예술’이라고 하여 온갖 권모술수에 뒷거래와 꼼수를 동원하는 꾼들의 얕은 정치를 돌파하여, ‘불가능의 예술’을 연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생각이 현실과는 먼 허황된 ‘꿈’처럼 들리더라도 그는 통상화한 삶의 틀에 도전하여 ‘진리’를 이야기하며 진리 앞에 ‘책임’을 지는 시민 참여의 깊은 정치를 그리며 이를 주창하였다. 그가 빈번히 끌어들이는 초월의 권위는 빈틈없이 삶을 통제할뿐더러 더할 나위 없이 삶을 타락시켜 거짓된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황폐한 체제를 벗어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힘의 밑바탕이다. 자칫 초월을 수직 차원으로 한정지을 수 있지만 이는 수평 차원으로도 뻗친다. 초월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 외국인들, 인간 공동체, 모든 생명체, 자연, 우주를 향해 뻗는 손길”이고, “심지어는 우리 자신이 아닌 것,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시공간상으로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그럼에도 우리와 함께 이 모두가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어 신비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깊고 즐거운 체험의 욕구”이다. 자기만을 챙기며 다른 사람을 모른 체하고 무시하는 ‘도덕 질병’에 걸린 ‘자기’를 벗어나고 넘어서는 “자기 초월”이다.

킹 목사가 쓴 ‘꿈’이라는 말이 얼핏 현실성이란 전혀 없는 지극히 나약하고 심지어는 이치에도 어그러지는 헛된 망상처럼 들리지만 그 ‘꿈’은 현실 체제를 완강히 거부하는 가장 강력한 의지이고 대안 체제를 지향하는 가장 호소력 있는 간청이다. 이러한 뜻에서 그의 꿈은 초월 차원에 잇대어 있으며 초월 돌파를 가리킨다. 현실이란 한계 투성이인 인간들이 굳혀놓는 한계 덩어리이다. 기껏 잠정의 정당성만을 지닌다. 무릇 현실은 극복되기 위하여 잠시 그 자리에 머물 뿐이다. 잠정의 현실은 영구한 현실이 될 수 없다. 잠정의 영역과 영속의 영역을 혼동하고 착각하는 자들은 현실 체제의 숭배자로 떨어진다. 초월은 체제 숭배를 거부하고 이를 돌파한다. 하벨은 바로 이 초월 차원에 자신을 잇댄다. 초월의 힘을 받아 체제에 빌붙어 체제의 요구와 지시에 순종하는 삶을 ‘거짓된 삶’이라고 보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참된 삶’의 가능성을 그리고자 한다. 통상의 삶을 넘어서는 꿈이 있는 한, 다른 말로 초월 감수성을 지닌 한, 현상 유지의 체제에 들붙어 살 수 없다.    


6. 시민 되새기기:

이 해 들어 우리는 새 대통령을 뽑고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맞았다. 여기에 모두가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모습만으로 우리가 모두 시민다움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맥 빠진 진부한 낱말로 격하하여 무의미하게 된 ‘시민’이라는 말을 격상시켜 제값을 갖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어느 도성에 거주하기만 하면 삶의 지향과 성격을 따져봄 없이 무작정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무의미하고 무익한 뜻과는 달리, 자기의 울타리를 넘어 공동의 선을 위해 참여하고 기여하는 진정한 삶의 지향성을 지닐 때 시민이 된다는 오래된 생각으로 돌아가 이를 다시 강조코자 하였다. 직장에 충직하고 집안에 충실하다고 해서 시민의 자격을 얻지 못한다. 직장과 집안의 사슬에 묶인 통상의 삶에 맞서는 삶, 시민의 덕목이자 자격이다. 시민은 사사로운 자기 이익의 추구에 여념이 없는 오늘날의 도시 거주민 그 이상이라는 뜻이다. 필요하다면 통상의 체제에서 누리는 자기 편리를 접고 자기 이익을 내던질 수 있는 ‘자기 재구성’의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투표 행위도 사사로운 이익 계산의 고삐에 끌려 움직이고 우크라이나의 침공도 자국의 경제 손익 계산으로 풀이하는 ‘시민’이라면 이는 거저 ‘국민’이고 ‘인민’일 따름이다. 시민다움을 품고 사는 시민은 이 모두를 넘어선다. 시민은 국민 이상이고 인민 이상이다. 시민은 경제 동물로 이해될 수 없고 물론 소비자로 값 매겨질 수 없다. 모든 것이 상품화될수록 가열 차게 이에 맞서 삶의 충만함을 되찾고자 분투한다. 세계가 더욱 좁아진 마당에 시민의 관심은 더 이상 국경의 철조망 안에 머물 수 없다는 도덕 의무감을 지닌다. 철조망을 뚫어야 하고 철조망을 걷어치워야 한다는 범세계 시민 의식의 결속 관계도 그린다. 벌써부터 ‘국경 없는’ 돈벌이는 자유 무역의 이름으로 허용하면서도 ‘국경 없는’ 지구 공동체의 결속 의식을 공유하지 않고 범세계 수준의 시민다움을 가꾸지 않는 현실의 삶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시민은 이를 문제시한다. 아무리 지정학의 복잡성을 들먹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어째서 침공당한 나라가 입고 있는 참화를 불구경하듯 대해야 하는지 이 지구 공동체의 ‘수치’를 시민은 피할 수 없는 생각거리로 삼아 이를 대화의 주제로 올려놓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정의되고 있다고 핀잔을 퍼부을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하여 ‘시민’은 어느 도시에 거주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시민다움’을 지닌 ‘시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통상의 틀에 맞춰 사는 자들의 삶의 지향성에서는 공동의 선을 위하여 자기를 조절하고 자기를 내놓는 시민다운 삶의 모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서 ‘통상의 삶’에 갇히기를 마다하고 ‘시민의 삶’을 살기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쉽지 않다. 시민이 들어서야 할 이 길은 좁다. 다수가 꺼려하여 피하는 길이다.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나 쉬운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 시민은 옳은 길을 택한다. 타성의 좁은 울안에서 자기만 챙기며 편히 살기를 부인하고 그보다 넓고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삶이란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해서 불편하고 부담스럽지만 시민은 이 삶을 옳다 여긴다. 이 점에서 시민은 통상의 지배 문화에 맞서는 반문화 운동의 대열에 서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옹졸한 의식 세계에서 벗어나 더욱 넓은 의식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옹졸함을 옹졸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만나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삶의 기회는 초월 감수성에 자신을 잇댈 때 빚어 나온다. 다행히도 이는 어느 문명권 하나에 진 치고 있지 않다. 누구나 자기가 속한 문명권의 샘물에서 흘러나오는 초월의 생수를 마실 수 있다. 시민은 이 생수를 마치면서 자기 성찰을 통한 시민다움의 기운을 얻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새겨볼 생각이다.  



<도움 글>

하벨,  바츨라프, 「불가능의 예술」 (이 택광 옮김) (서울: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홍 혜경, “모임 알림: 4/12(화) 화요모임 안내(오후 8시) --루렌도 가족을 만나다” (2022.04.04.).

Durkheim, Emile, The Elementary Forms of the Religious Life (New York: Free Press, 1995).

King, Jr., Martin Luther, A Testament of Hope: The Essential Writings of Martin Luther King Jr. (J. M. Washington 엮음) (New York: Harper & Row, 1986).

Weber, Max,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30/1958).

www.yeramchurch.org/zboard/view.php?id=bibl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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